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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un Jun 14. 2022

'팔래요'를 좋아하세요?

[잡담] 사용자 층은 넓고 그들이 처한 상황도 다양하다

뭘 좋아할지 몰라 대충 하나씩 만들어 봤어요.



가끔 지인들과 이런저런 UX 라이팅 관련 쌉소리를 나누곤 하는데, 얼마 전 증권 매수/매도 버튼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내용이 좀 재미있어서 공유합니다.


A: 드디어 증권 앱의 매수/매도 버튼에 살래요/팔래요가 나왔습니다...

나: 으어... 그 망할놈의 ‘해요체병’이 창궐해서 결국 여기까지...!

A: 이 메뉴를 띄울 수 있을 정도면 이미 주식 앱에 빠삭한 사람일 텐데... 이 버튼 괜찮을까요?

나: 이 화면까지 왔다면 어느 정도 평균 이상은 된다고 봐야죠. 본인 인증의 큰 산을 넘어서 온라인으로 계좌 개설까지 한 거 아닙니까?

그거 엄청난 허들인데… 그걸 넘어온 인내심과 인지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매수/매도 버튼을 이해 못 할 리가 없을 텐데... 그나저나 버튼이 '살래요'가 되면 이거 영어로 번역하면 뭐가 되는 건가요?  'I wanna buy it!'? ㅋㅋㅋ

A: 이럴 때만은 영어 UI 텍스트가 Buy로 퉁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론 누군가 영어 버튼에 소울(?)을 담아달라고 하면 거기서부터 머리 아파지겠지만요.

나: 저 '-래요'의 되바라진 잼민이 인상은 정녕 나만 웃기는 것인가요? 어떤 할아버지 투자자가 이 버튼 누른다고 상상해보면 좀 저는 좀 재미진걸요. 주식투자 경력 47년, 83세 황순범 씨 왈 '대범 E&C 팔래요~!'

A: 언어에 예민한 사람은 찝찝할 테고, 뭐든 상관없다 하는 사람에게는 뭐 그냥 버튼일 뿐이겠죠. 우리가 이런 일 해서 예민한 것일 수 있어요.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B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B: 저는... 손절할 때 '팔래요'를 보면 속 뒤집어질 거 같은데요...


아아아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의 말에 다들 '정말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라도 울면서 손절할 때 '팔래요'를 보면 속 뒤집어질거예요.

손해를 극심하게 봐서 울면서 억지로 파는 상황에선 '매도'나 '팔기'보다 왠지 '팔래요'누를 때 더 속이 뒤집어질 거 같아요. (아아악 ㅠㅠ내 -49.5% 주식 생각나버렸다...)

'-래요'가 가진 의지의 뉘앙스와 내가 팔고 싶어서 파는 게 아닌 이 상황이 충돌하는 것이 제일 싫지만, 내 속은 타들어 가는데 저 해맑은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 것처럼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것도 싫을 것 같아요.


아이고 내 돈... 아이고오 내 도오오온....!

난 지금 해맑을 수 없다고 이 사람아아아아!

무슨 래요는 래요야! ㅠㅠ


요즘 마켓이 안 좋아서 울면서 파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던데(특히 오늘 2022년 6월 14일 샘표 간장 빼고 아주 다 폭락...) 사실 그분들의 멘털까지 신경 쓰고 싶어 하는 게 UX 라이터죠.

돈 날려서 마음도 안 좋은데 괜히 말 잘못했다가 서비스에 진노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사용자 심기 경호 그거 무척 중요합니다.


사용자 층은 생각보다 매우 넓고, 각각의 사용자가 처한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합니다.

언제, 누가, 어떤 상황에 보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텍스트를 쓰는 게 가장 좋겠죠.


저 위의 6가지 버튼은 그냥 웃겨서 만들어 본 것이지만, 실제로 라이터들은 여러 가지 안을 만들어 내는데 도가 튼 사람입니다. 중요하거나 독특한 스펙에 들어가는 UI 텍스트를 작성해야 하는 경우, UX 라이터들은 단숨에 여러 가지 안을 쭉쭉쭉 써냅니다. 윗선에 보고할 때가 아니면 스포티파이처럼 프레임워크로 문서화까지는 하지 않지만(그러기엔 하루에 처리하는 양이 너무 많아요) 까다로운 케이스일 경우에는 여러 개의 후보군들을 잡아 놓고 조건에 맞지 않는 안을 소거하거나, 기획자에게 이 중에서 선택을 해달라고 하기도 하죠. 어느 게 기획 의도나 우리 상황에 비춰볼 때 가장 나은 것 같은지 말이죠.


한 사람이 너무 오래 같은 케이스를 파다보면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차라리 후보군을 많이 마련해서 신선한(?) 정신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선택해 보라고 하는 게 낫습니다. 제일 좋은 자문가는 동료 UX 라이터입니다. 맑은 정신 상태+ UX와 언어에 대한 전문성+ 자사 텍스트 가이드에 대한 지식까지 있는 사람이니까요.


아 맞다, 윗분께 바로 후보군을 다 보여드리면 안 되는 거 아시죠?

ABCDE 중에서 의사결정권자가 최악의  E 고르는 일이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좋은 것만 엄선해서 보여드려야 합니다.

우리 직장 생활로 모험하지 맙시다.


암튼 저 위의 버튼 텍스트 스타일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 오늘은 마무리할까요?


서술성 명사: 모든 버튼 레이블로써 가장 무난한 형태. 주로 한자어로 된 어휘 난이도가 관건
서술성 명사+하기: 사용자가 미묘하게 다짐하는 인상. -하기는 과업의 시작 지점에 사용해야 함. 마지막 결정 버튼에는 어울리지 않음
용언+ 기: 서술성 명사와 동일. 어휘 난이도가 낮은 경우가 많지만 조어에 한계가 있음
용언+하십시오: 사용자와 서비스가 공적이고 동등한 관계로 상정됨. 약관 동의류 외에는 버튼에 잘 사용되지 않음
용언+ㄹ게요: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 '-게'가 붙은 해요체. 상대에게 약하게 순응/약속하는 인상을 주며 사용자의 위계가 비교적 낮게 상정됨
용언+ㄹ래요: 행동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해요체. 구어체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으며 사용자의 연령이나 위계가 낮게 상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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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써뒀던 글인데 오늘 주식 시장이 특히 안 좋아서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내 돈....ㅠㅠ)

근 2달 동안 브런치에 새 글을 못 올리고 있네요.

몸이 꽤 아파서 쉬고 있습니다. 밥벌이도 간신히 하는 상태랄까요.

'내가 좋아하는 UX 라이팅' 시리즈에 쓸 내용이랑 대상 케이스도 다 선정되어 있거늘, 도무지 쓸 수가 없답니다. 그야말로 저근덧 역진(力盡)하였습니다. 골골골.

새삼 어느 유료 매거진에도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한 과거의 저에게 잘했다고 해주고 싶네요.

돈을 받았기 때문에 억지로 글을 써야 했다면 지금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매인 곳은 직장 하나로 족합니다.


자, 그럼 또 잊힐 때쯤 나타나겠습니다. 부디 편히 잊고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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