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UX writing(2): Apple의 보이스
누가 좋아하는 서비스 보이스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저는 온라인/오프라인을 다 볼 경우엔 Apple, 오프라인인만 볼 경우엔 IKEA를 말합니다. 거대한 이 두 회사의 보이스는 무척 명확하고 개성적이거든요. 누구든 광고나 온오프라인 카피를 통해 이들 브랜드의 아우라와 가치를 느낄 수 있죠. 특히 Apple의 경우 프로모션 동영상 자막에서부터 매장 배너 문구에까지 그들의 자신감과 단호함이 묻어납니다.
Apple의 단단한 보이스는 선언적인 짧은 문장을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어떤 사람은 그걸 보고 ‘뭐가 이렇게 불친절해? 왜 말을 하다 말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Apple입니다. 대담하지만 세련된 그것.
그래서 저는 망설임 없이 브랜드의 퍼스널리티가 보이스로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로 Apple을 꼽곤 합니다.
Apple은 보이스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톤에서도 텐션이 높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서비스들은 온보딩 메시지에서 사용자를 억지로 들뜨게 하려고 축포를 쏘아 올리고, 아주 난리법석인 톤을 사용하지만(그때의 사용자 표정은 엄청 덤덤한데 나만 신났지...), Apple은 온보딩에서 조차 호들갑스럽지 않습니다.
온보딩 이후부터는 더욱 차분하고 냉정한 톤이 유지되고요.
뭘 좀 팔아하는 App store의 큐레이션 배너 같은 것을 봐도 그래요. 홍보와 광고를 두루 해야 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느낌표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국내외 쇼핑몰이나 상품 큐레이션 서비스들이 고래고래 외치면서(느낌표를 써서) 구매를 강권하고 있는지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런 화면 몇 페이지만 돌아다니면 눈과 귀가 아플 지경이라니까요.
하지만 Apple의 큐레이션 배너들은 그렇지 않단 말이죠. 우아하고 차분하게 '여기 이런 앱들이 있어요. 내가 보니까 이런 면에서 좋더군요' 정도에서 끝납니다. 이게 돈 있는 집(?)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암튼 뭘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보이스는 흔들림이 없으며 톤 역시 고고하고 차분합니다.
Apple의 이런 자신감 있는 보이스는 UI 텍스트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Apple은 극단적으로 UI 텍스트를 간결하게 쓰는 것으로 유명해요. 여간해선 길게 설명하는 일이 없죠. 보통 자신 있는 사람은 길게 말하지 않거든요. 본인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가차 없이 쳐낸 심플한 UI 텍스트에는, 수식언도 거의 없습니다. 사용자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나, 설명이 부족해서 기능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염려 따윈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런 다정한 걱정병은 UX 라이팅을 하는 거의 모든 라이터, 기획자, 디자이너가 앓고 있는 지병(?) 임에도 불구하고요.
Apple의 제품에서는 사용자가 어렵다고 아우성친다 한들 그건 그냥 개별 사용자의 문제인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Apple의 제품을 쓰다 보면 도무지 이들이 만들어낸 것에는 오류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것이 설계자의 예상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이 유니버스 안에서 어긋나거나 잘못될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인상이에요. 그들은 아주 단호하고 확신에 차있죠.
그러다가 정말 오류가 발생하면? 그때도 역시 냉정하고 담대합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계속하던 일을 하세요.' 이게 다예요.
그들이 이렇게 쿨한 톤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자사 제품에 굉장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오류가 자신들이 구축한 단단한 세계관을 흔들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문자 그대로의 ‘Keep Calm and Carry On’을 서비스 보이스로 구현한 것, 그게 Apple의 보이스입니다.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런 보이스는 Apple이라는 기업이 가진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의 UX/UI를 리딩하는 회사니까요. 수많은 3rd party 앱 기획자, 디자이너들이 모두 Apple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요? 모든 서비스와 앱의 근간이 되는 OS UI를 만드니까 어쩔 수 없이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고, 또 세계에서 제일 잘한다는 UX 디자이너들이 산출물을 만들어내니까 그걸 보면서 '오오 잘한다... 오오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죠.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다.
기업의 파워, 권위, 아우라 이런 것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잖아요.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자성(磁性)처럼 많은 업계인들을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이런 Apple 보이스를 아주아주 작은 한국어 서비스에서 구현했다고 상상해 보면,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제 생각엔 아마 꽤나 혹평이 쏟아질 것 같아요. 건방지네, 불친절하네, 어렵네, 사용자 친화적이지 않네, 정보가 부족하네, 고루하네, 거만하네, 기계적이네 등등 말이죠.
힘없는 게 그래서 서럽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UX 법칙은 제이콥의 법칙입니다. 법칙이라고 하기도 뭐한데 아무튼 싫어요.
이 제이콥의 법칙이 무엇이냐면 사용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사이트(서비스)에서 보내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사이트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화면, 즉 사용자에게 익숙한 패턴의 디자인을 선호한다는 주장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서비스는 지금 이 시점에서 뭐가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지를 찾고 그 익숙함을 발판 삼아 그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죠. 사실 이 제이콥의 법칙 때문에 디자인 패턴이나 UI 패턴이 있는 거고, 뭔가를 기획하기 전에 벤치마킹을 하는 게 꼭 필요하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여러분은 보통 벤치마킹하실 때 뭘 보시나요? 혹시 닐슨 선생님이 말씀하신 익숙함(accustomed)을 IT 공룡들의 프로덕트에서 찾으려 하진 않나요? 해외에선 Apple, Google, MS, Meta, TiKtok 같은 대형 서비스, 국내에서는 네카라쿠배당토 정도?)
사실 제가 정말 싫어하는 건 제이콥의 법칙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법칙을 카피캣(Copycat)의 실드처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 또는 혁신적인 제품의 개발자는 아주 소수이기 때문에 패스트 팔로워가 되는 것은 우리들의 숙명이겠지만(서럽지만 인정한다...), 선두주자를 뒤쫓는 입장에서 그걸 캐치 업할 생각을 해야지 카피를 하면 되겠습니까? 무슨 컬러 테마만 바꾼 것처럼 따라 하면 정말 난감하다고요. 닐슨 선생님이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게 유리하다고 했지 똑같이 만들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UX 라이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큰 서비스가 '내가 하는 UX 라이팅이 맞네, 내가 제일 잘하네' 이러고 언플하면 다들 우르르 '저게 맞나 보다, 큰 기업이니까 어련히 잘했겠냐, 나보다 낫겠지, 난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 베끼자' 이런 식으로 따라 쓰는 건 매우 매우 곤란합니다. 그러면 안 돼요 정말.
우리 서비스의 UI/UX가 다른 서비스와 같을 수 없고, 동작 방식이 비슷하다 해도 내부 로직이나 플로우, 세부 화면과 구성 방식은 분명 다를 겁니다. 그렇게 다른 화면 UI에 대한 UX 라이팅의 산출물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화면이 다르고 구성이 다르고, 콘셉트가 다르고, 만드는 사람의 철학과 목표가 다른데.
아무리 큰 서비스나 회사가 UX 라이팅 잘한다고 쇼 오프 해봤자 그게 좋은지 안 좋은지는 그쪽 화면과 서비스 사정이고, 우리는 우리의 사정이 있는 겁니다. UX 라이팅의 대원칙이 있기는 하고, 그 원칙에 맞게 잘 썼는지 안 썼는지를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 그 원칙을 그쪽 사정에 대입한 것일 뿐 우리는 우리 서비스에 맞게 글쓰기 원칙을 적용해서 새로 써야죠.
무비판적으로 같은 기능명, 메뉴명, 문체, 어휘를 베끼면 안 됩니다.
특히 서비스 보이스라는 건, UX 라이팅이라는 건 인간의 성문(聲紋)과 같아서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됩니다. 성대모사 가수 되려고 UX와 UX 라이팅 하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
남의 서비스 분석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내 몸과 내 존재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 서비스 규모가 크고 외부 쇼 오프를 많이 하는 조직인 경우에 끄는 힘이 더 큽니다. 특히 작은 서비스의 주니어 UX 디자이너들은 홀린 듯 끌려들어 가서는 똑같이 따라 쓰고 싶어질 수 있어요.
그렇지만 부디 큰 서비스 분석은 적당히 하시고 내 논리, 내 구조, 내 서비스의 가치와 철학에 더 많이 집중해 주면 좋겠습니다. 미친 듯이 개성적이고 괴랄한 보이스를 구사하거나 아방가르드한 내용을 UI 텍스트에 시도해서 튀어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남의 집은 적당히만 들여다보고 열 배는 더 우리 집 내부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목소리를, 우리가 사용자에게 보여줘야 할 정보의 양과 질, 타이밍, 위치, 구성에 집중해서 기준을 가지고 새로운 텍스트를 쓰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UI 텍스트에는 다 그렇게 쓴 근거가 있어야 해요.
'OO 서비스에서 그렇게 해서 똑같이 했는데요'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제이콥의 법칙을 잘못 해석하면 이 세상에서 UX를 할 수 있는 사람은 Apple 디자이너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나머지는 다 그거 베끼면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것들을 만들어 보려고 이 바닥에 뛰어들었잖아요? 지구 상에 Apple, Google, Meta, 네카라쿠배당토만 있게 할 겁니까?
그러기 싫어서 UX 하는 거잖아요. 더 좋은 걸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여 보겠다고.
그렇다면 끌려들어 가서는 안됩니다.
버텨요. 당신은 당신의 UX writing을 해야 합니다.
요즘 'OOO 서비스처럼 쓰기'와 같은 따라 하기 풍조가 있는 것 같아서 꼰대로서 한마디 해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Apple의 보이스를 좋아하고 부러워하긴 하지만, 그걸 따라 하고 싶진 않아요. 그보다는 Apple UI 텍스트의 정보 구성력을 배우고 싶습니다. 화면 흐름에 맞게 정보를 착착착 쌓아서 일을 성사시키는 능력이 아주 탁월하거든요. 구멍이 별로 없어요.
원래는 '내가 좋아하는 UX writing(2)'에서는 Apple과 IKEA의 보이스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고 제가 좋아하는 버튼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잠깐 빡쳐서(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네요.
다음 글에는 딴 길로 새지 말고 IKEA 이야기를 잠깐 한 다음에 제가 좋아하는 버튼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