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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un Jan 05. 2024

[단상] 전문가란 무엇인가

요즘의 고민, 올해의 다짐


로저 니본의 <일의 감각(Expert)에서 한 사람이 Master가 되는 과정을 설명한 도식. Master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뛰어넘기 같은 거 없음


오늘은 UX 라이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커리어에 대한 소소한 쌉소리이니까 안 읽으셔도 되어요.


일하기 싫지만 이왕 해야 한다면 전문가가 되겠다


지난 한 해 제 머릿속을 온통 채운 단어 하나를 꼽아 보자면 역시 '전문가'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하는 책 다섯 권을 뽑으라면 항상 그 안에 드는 책, 로저 니본의 일의 감각을 다시 읽어봅니다. 마스터가 되는 과정에 대한 로저 니본의 이 도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제 자신의 커리어 패스를 이 도식에 맞춰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그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 이것부터 확실히 하고 가죠.

단호하게 말씀드리지만, 저는 노동이 싫습니다. 신성한 노동 어쩌고 저쩌고 하는 분이라면 기함하시겠죠.

하지만 싫다고요 노동.

아 진짜, 꿈은 없고요 편안하게 놀면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누가 내 마음에 도청 장치 달았니


하지만 저는 자본가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합니다. 처음 사회로 나와 밥 벌어먹을 궁리를 시작하면서 저는 결심했어요.

이왕 해야 한다면 뭐든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UX 라이터는 '사용자 경험 언어'라고 하는 좁고 깊은 영역을 그야말로 디깅하는 직군이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1 제너럴 리스트가 아닌 스페셜 리스트로 성장할 확률이 높습니다. 패밀리 서비스가 있는 큰 규모의 회사에 몸 담고 있다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술이 계속 예민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처리해야 하는 서비스 도메인, 프로덕트, 상세 케이스가 다양한데, 일은 모던 타임즈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쉼 없이 밀려들어 옵니다. 앉아서 하루 9시간 넘게 십여 개의 설계서를 보고 리뷰하고, 쓰고, 고치고, 비판하고, 싸우고, 설득하고, 절충안 찾아서 협의하는 일만 집중적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요상한 케이스가 폭격처럼 날아드는 걸 받아내면서  오묘한 설계와 개발 스펙을 목격하면(아니 이런 버그가 있다고? 이런 어뷰징유저가 있다고????) 사용자 경험 언어를 다루는 숙련도는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겠죠.


이건 조각가에게 매일매일 다른 종류의 물질을 주고 작품을 만들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을 깎아보게 하면 결국 그는 각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게 되고 어떤 물질을 줘도 매끈한 한 점의 마스터피스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물론 그렇게 되려면 몇 천, 몇 만의 다른 종류의 물질을 공들여 들여다보고 다듬어봐야 하겠지만요.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선생님들이나 저나 5세에 대학과 중용을 떼고 시를 지어 상으로 받은 비단을 질질 끌고 갔던 초천재 김시습 과가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6, 7년 이상의 집중적인 수련 시간이 절대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전문가로 불리기 위해선 예과, 본과, 인턴, 전문의 과정까지 최소 11년-14년이 필요하잖아요. 그보다 덜 심각하고 덜 어려운 분야의 경우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수련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죠. 요컨대, 진득하게 앉아서 고요하게 일과 그 일을 둘러싼 사람들을 파는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루하고 막막한 시간을 참고 받아들여야 하죠.


*1 여기서 운이 좋다는 것은 다니는 회사에 풍파(...)가 없고, 중간에 원치 않는 직무/직군 전환을 겪지 않으며, 회사 내에서 잡부로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설계,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라이팅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스터는 기술을 전수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저는 제 커리어에서 언제까지가 도제 기간이 었는지, 어떤 회사에서부터 나만의 기술과 스타일을 확립한 저니맨으로 일했었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마스터로 접어들었는지를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각 단계에서 로저 니본이 이야기한 것들을 실제로 경험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좋아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경험한 그것이 사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남들도 나와 같은 경험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야말로 "야, 너두?"같은 기분을 느꼈거든요.


저는 운 좋게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프로덕트와 도메인을 경험했습니다. 과장을 조금만 보태면 화면 설계에서 출현할 수 있는 모든 케이스에 대해 접해봤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이 분야의 어떤 일도 어렵지 않게 해내고, 내 기술을 타인에게 전수할 수 있는 마스터 단계에 진입한 지는 2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는 마스터 단계의 초입에 와있습니다.


일단 마스터 단계에 진입하면 도제를 교육할 책임이 부여됩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마스터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이 발견하고 알게 된 것들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진정한 마스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게도 도제 교육의 경험이 있습니다. 2년 전에 저는 다른 마스터 라이터분과 함께 6개월 동안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UX 라이터 도제 교육을 했었습니다. 끼고 앉아서 하나하나 가르치는 도제 교육 말이죠.


그건 내 안에 차 있던 지식이 타인을 훈련시키면서 펑! 하고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경험이었어요. 초심자에게 도제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술술술 가르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모든 질문에 막힘 없이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있었고, 답은 더 깊은 주제로 이어져 계속해서 가르칠 것들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스스로가 저니맨에서 마스터로 단계의 초입으로 완전히 이행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2


작년에 냈던 제 첫 책은 이런 기술 전수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얼굴을 본 적 없는 도제와 저니맨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마음으로 썼어요.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 일과 이 일을 하는 소중한 인재들을 잘 부탁드린다는, 일종의 커버레터를 써서 보내는 마음도 있었고요. 책을 내면서 스스로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시니어로서 해야 할 최소한은 일단 했다는 안도감으로 동그랗게 등을 말고 숨을 내쉬었습니다.


*2 그때 제 기술을 공유했던 그분은 스스로 도제의 시기를 지나 지금은 저니맨의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그분과 매일 같이 일을 하지만, 참 잘하시고 보기가 좋습니다. 강단과 언어 능력, 열정을 모두 지녔으니 5, 6년이 지나면 자신이 담당하는 언어의 훌륭한 UX 라이팅 마스터가 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기


마스터는 자신의 지식과 통찰을 잘 발전시켜서 그 분야의 비틀기, 즉 혁신을 일궈내야 합니다. 기존의 스타일을 답습하면서 숙달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단 한 걸음이라도 누구도 밟지 않았던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야 하죠. 새로운 분야와의 콜라보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좋은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나아가기, 즉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기 위해선 고민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던 대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상한 걸 시도해 봐야죠. 발견한 것들의 논리를 세우고 근거를 수집해야 합니다. 내가 발견한 것이 맞는지 몇 번이고 적용해서 결과를 보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검증받아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자존심 상하지만 고쳐야 하죠. 이론과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고르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오펜스와 디펜스를 번갈아가면서 해야 하고요.


이건 굉장히 많은 육체와 감정의 에너지와 시간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생뚱맞게 틀린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UX 라이팅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라고 이의를 제기해야 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대해서 진정성을 가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이 일과 이 업계에, 무엇보다 우리의 사용자에게 어떻게 내가 기여할 수 있는지 계속 생각해야 해요.


그래서 요즘 좀 고민이 많습니다. 발견과 기록을 허투루 할 수 없는데 시간과 에너지는 없고 돌봐야 할 것들은 늘어만 갑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은 많은데 기록할 겨를이 없어서 그저 흘러가 버립니다. 분명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다른 것을 잡고 있다가 그냥 가버렸어요. 아까워 죽겠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과 정신이 약해지는 걸 느끼고 더 많이 쉬어야 간신히 주어진 일을 해낼 수 있는데, 발견하는 것도 선명해지는 것도 같이 많아지니 괴롭네요.


사실 매일의 업무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겁습니다. '아, 이거 언제 다 정리하지... 그냥 뭉개다가 은퇴할까...' 그런 생각이나 듭니다. 근데 뭉개다가 은퇴해도 되거든요. 내심 그러고 싶거든요. 말씀드렸잖아요. 노동하기 싫다고. 그럼에도 뭔가 정리를 해야 한다는 이 의무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아마 잠시나마 학계에 있었던 게 문제가 아닐까... 저는 의심하고 있습니다.(대학원 가지마세요. 여러분)

아무튼 케파가 딸린다. 그게 요즘의 저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일어나 글... 써야지


그래도 올해의 목표를 아니 세울 수는 없으니 이런 결심을 해봅니다.


올해는 도제의 길로 들어서려는 열정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응원하고,

도제에서 저니맨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자.


작년에는 좀 어려운 책을 냈으니 올해에는 좀 쉽고 짧으면서도 다정한 책을 써보고 싶기도 하고, UX 라이터 도제님들을 위한 영어책 스터디를 하나 돌려볼까 생각도 해보고요. 왜 유료 클래스 강의나 언론 기고 같은 거 안 하냐고 묻는 분도 계신데, 회사에 몸 담고 있어서 외부 활동이 어렵습니다. 근근이 실무진 대상 기업 강의를 가는데, 역시 갈 때마다 좀 아쉽네요. 이걸 한 학기로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데... 이렇게 훑고 지나가기에 너무 아깝다. 할 말이 참 많은데... 하고 말이죠. 사실 제가 10년을 고 3 전문 언어 영역/논술 강사로 대치, 평촌, 중동, 상계, 목동 등 안 가본 학원가 없이 뛰어서 대학원까지 먹고살았으니까, 야부리 터는 강의력은 꽤 좋은데, 악필 때문에 판서를 못해서 1타가 못되었...(이하 생략)


UX  라이터 10년차를 넘어서 11년 차가 되는 올해.

12년 전에 페북에 남긴 제 글에 지도교수님이 달아준 댓글을 보며 '그래도 이제 어느 회사, 어느 서비스에 투입되어도 A set of standard service를 제공할 수 있는 훈련된 사람이 되었으니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문가라고 불리면 여전히 쑥쓰럽지만 말입니다. 전문가는 무슨 전문가. 그냥 늙다리 고인물이죠.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된 지도교수님과 나



오늘은 쌉소리가 길었군요.

그냥 여러분들께 새해 인사나 할 것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봐주지 않는 오은영 선생님



+

이러고 끝나면 ㅋㅋㅋㅋ 좀 그러니까 로저 니본의 인터뷰도 뒤늦게 첨부합니다.

늘 제자리만 맴도는 것 같은 느낌에 힘들어하는 도제와 저니맨에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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