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ce of case 1] 확실한 약속으로서의 대안 제시
새해의 결심은 '도제의 길로 들어서는 열정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저니맨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그 일환으로 Piece of case라는 시리즈를 써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여러 회사에서 여러 설계안을 보면서 꽤 자주 처리했던 케이스들 중에, UX 라이터의 고민이 담겨 있는 케이스들을 선별해서 가상의 상황 만들어 볼게요. 언뜻 간단해 보여도(Piece of cake!) 그 안에 실무진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케이스를 다루려고 하는데, 앞으로 몇 편이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재미없으면 이것만 쓰고 말고요.)
실제로 이렇게 작업하냐고 물으시면 'Yes'입니다. Writing direction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에는 주로 회의에서 얼굴 뵙고 말씀을 드리는 걸 좋아합니다. 그게 어렵다면 메일, 인라인 코멘트, 슬랙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는 편입니다. 길게 상소문을 쓰는 건 최소한으로 하고 구두로 말씀드리고 간단하게 기록만 남기는 쪽을 선호하긴 하지만, 상소문... 써야 하면 쓰는 거죠 뭐.
PM A는 한 블로그 서비스에서 텍스트 에디터의 콘텐츠 화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펙트나 서식 등 다양한 에디터용 콘텐츠를 CP를 통해 비용을 들여서 구비해 두고 사용자가 손쉽게 콘텐츠를 적용해서 멋진 글을 써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인데 사용자의 반응도 좋습니다. 다만 콘텐츠의 종류가 많아짐에 따라 예상하지 못했던 오류 케이스 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CMS(Contents management system)에서 콘텐츠를 잘 관리하고 있지만, 종류가 워낙 다양하고 애니메이션, 인터렉션 등도 포함되어 있다 보니 앱 버전에 영향을 받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뭔가 꼬이는 부분이 있는데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케이스들이 론칭 이후 하나둘씩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 개발팀에서 한 에러 케이스에 대한 신규 오류 문구 1건이 필요하다고 요청이 왔습니다. A는 UX 라이팅 팀에게 에러 텍스트 작성을 요청했고, 담당 UX 라이터 J와 함께 이 건에 대해 논의를 시작합니다.
[오류 상황]
1) 콘텐츠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
2) 특정 앱 버전 이상에서만 지원되는 콘텐츠인데, 하위 버전 앱 사용자가 콘텐츠에 접근했을 때
*현재 1)과 2)의 오류를 구분할 수 없으며 1개의 문구가 표시되어야 한다.
[표시 컴포넌트]
1 버튼(확인) 팝업
[개발팀 제안 안]
사용 불가한 콘텐츠입니다. 앱을 업데이트하거나 콘텐츠를 다시 확인하세요.
J: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개발에서 오류 상황 2개를 구분할 수 없는 게 확실할까요? 다른 기능에선 이 정도는 구분이 되었던 것 같거든요.
A: 네, 지금으로선 1과 2 오류를 구분할 수 없어서 문구 한 개로 표시되어야 한다고 해요.
J: 2번 같은 경우는 하위 버전 사용자에게는 아예 콘텐츠가 화면 노출 안 되는 게 베스트인데, 당장 수정은 어렵다는 것이군요. 솔직히 1과 2는 너무 결이 다른 오류라서 같이 묶어서 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요.
A: 네 저도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까... 2번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주고 싶어요. 좋은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한 명이라도 더 쓰게 하고 싶거든요.
J: 그러게요. 비용을 들여서 만들었으니 앱 업데이트를 시켜서 그걸 쓸 수 있게 하면 좋기는 하죠. 좀 고민되네요. 1번과 2번의 발생 빈도나 비율은 어느 정도 되지요?
A: 현재는 발생 빈도나 비율조차 알 수 없어요. 아예 구분이 불가능한 상황이니까요.
J: 그렇군요. 조금 더 고민해서 의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J의 리뷰 의견이 A의 메일함으로 도착합니다.
[개발팀 제안 안]
사용 불가한 콘텐츠입니다. 앱을 업데이트하거나 콘텐츠를 다시 확인하세요.
[UX 라이터 리뷰]
사용할 수 없는 콘텐츠입니다. 다른 콘텐츠를 선택해 주세요.
[리뷰 방향에 대한 코멘트]
'A를 하거나 B를 하세요'처럼 '하거나'를 써서 복수의 대안을 제안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입니다. 시스템이 문제 원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드러날뿐더러, 오류를 경험한 고객에게도 무책임한 방식이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가 쇼핑 중에 뭔가 문제가 있어 백화점 서비스 데스크에 가서 문의를 했을 때 "4층에 가보시고 혹시 안되면 12층에 한 번 가보세요."라고 하면 '왜 확실히 말해줄 순 없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까요? 사용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가능한 한 명확한 답을 줘야 합니다. '4층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요.
만약 확정할 수는 없어도,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는 상황이라면 그때에는 예외적으로 '하거나'를 씁니다. 그러나 이때 or로 제시된 대안 2개 중 1개를 시행하면 사용자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4층에 가거나 12층에 가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실 겁니다"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하거나'를 쓸 수 있겠습니다. (만약 3개 이상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면 or로 연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걸 다 해보라는 건 사용자에게 무리한 요구입니다. 그쯤 되면 설계나 개발에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나쁜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4층에 가보시는데... 그래도 안될 수 있거든요. 그때는 안되는 거니까요. 그냥 포기하세요"같은 대응 말입니다. 꾸역꾸역 4층을 돌았는데도 해결 못했을 때 허탈하고 화나는 고객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케이스에 대한 코멘트]
이번 케이스는 어떤 대안을 주더라도 해결을 완벽하게 담보할 수 없는 케이스로 보입니다.
콘텐츠 탭하면 "사용 불가한 콘텐츠입니다. 앱을 업데이트하거나 콘텐츠를 다시 확인하세요." 팝업 표시
1) 유효하지 않은 콘텐츠인 경우
1-1 특정 버전 이상의 사용자: 최신 버전으로 앱 업데이트 시도-> 오류 해결 불가
1-2 하위 버전 사용자: 최신 버전으로 앱 업데이트 시도->오류 해결 불가
2) 특정 버전 이상에서 쓸 수 있는 콘텐츠인 경우
2-1 하위 버전 사용자: 최신 버전으로 앱 업데이트 시도-> 오류 해결 가능
2-1 사용자를 위해 문구에 '앱 업데이트'를 표시해서 1-1, 1-2 사용자에게 불필요하게 앱을 업데이트를 시켰는데, 그럼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1) 케이스였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용자는 앱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워서 더욱 화를 내게 되겠고, 서비스를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되지도 않을 일을 시켜 괜한 헛짓거리를 하게 만드는 서비스라고 여기겠지요. 약속한 것과 다르다고도 생각하겠고요.
서비스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 서비스가 발생한 오류 상황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에 대한 사용자의 믿음에 균열이 가고, 그때부터 사용자는 이 서비스는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써보든가, 아니면 믿을 수 없으니 떠나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물론 이런 오류 발생 빈도가 높지 않고, 그 마저 1:9처럼 한쪽 오류의 발생빈도가 확실히 높은데도 오류 문구를 분리하기가 어렵다면 눈물을 머금고 융통성 있게 처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송구하지만 1)의 사용자를 버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발생 빈도와 비율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면 1)의 사용자가 99명, 2)의 사용자가 1명 발생하는 그야말로 가장 좋지 않은 발생 케이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어떤 사용자도 이 오류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지 않도록 이 콘텐츠를 사용 불가한 것으로 안내하고 다른 콘텐츠 선택을 유도하는 보수적인 대응이 최선이라 여겨집니다. 소중한 콘텐츠 1건을 사실상 사장(死藏) 해야 하겠지만, 우리 서비스에 대한 사용자의 믿음을 지키는 방향으로 리뷰 의견드립니다.
[텍스트 스타일에 대한 코멘트]
*앱 업데이트 시 항상 최신 버전 업데이트을 권장합니다. 해당 표현을 추가합니다.
*'콘텐츠를 다시 확인한다'는 표현도 이 맥락에서는 모호합니다. '확인하라'는 보통 사용자 오입력 등으로 오류가 발생했을 때처럼 재확인 후 수정을 요청해야 할 때 적합한 요구입니다. 콘텐츠를 다시 확인한다고 해서 사용자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없으므로 해당 표현은 삭제합니다.
*원칙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콘텐츠입니다'와 같은 상황 진단만 제공해도 충분합니다. 아이템 선택 상황에서 사용 불가 메시지를 보면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용 흐름이니까요. 다만 컴포넌트가 팝업이라 공간이 충분하고, 일부 사용자에게는 단호한 상황 진단이 사뭇 사용 불가 선고처럼 냉정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어서, '다른 콘텐츠를 사용해 보라'는 이후 액션에 대한 가이드를 추가합니다. 컴포넌트가 토스트로 변경될 경우 두 번째 안내 문장은 생략할 수 있습니다.
*'앱을 업데이트하거나 다른 콘텐츠를 선택해 주세요.'로 하면 대안 A or B로 100%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냐고 하실 수 있겠지만, '다른 콘텐츠를 선택하라'는 말은 '이건 쓸 수 없습니다'를 완곡하게 돌려 안내한 것일 뿐 대안은 아닙니다. '앱을 한 번 업데이트해 보고 안되면 포기하세요'라는 말을 조금 멋들어지게 말한 것일 뿐이지요. 확실하게 작동하는 대안은 신뢰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어 굉장히 무겁습니다.
UX 라이터 J의 리뷰 텍스트와 의견에 PM A는 공감했지만, 블로그 콘텐츠 프로젝트 팀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PM A가 오너십을 갖고 팀원들을 설득했고, 개발팀에서 오류나 하위 버전 사용자의 콘텐츠 표시 로직을 조금 더 살펴보고 개선해 나가기로 합의해서 최종 J의 리뷰 텍스트가 적용되었습니다.
선택의 상황에서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지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분명 1명에게라도 비싼 비용을 들인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면, 99명의 사용자가 약간의 시간낭비를 하거나 실패를 겪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으며, 저 또한 그런 사고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럴 때 UX 라이터는 자신이 서비스 전체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비스의 다른 기능에서 유사한 케이스들이 발생했을 때에도 우리는 일관된 태도를 취해왔다고요. 우리는 그동안 모든 텍스트에서 사용자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어필했고 사용자가 모든 텍스트를 신뢰할 수 있도록 브랜딩 해서 써왔는데, 여기에서만 이러시면 어렵게 구축한 서비스 페르소나가 균열이 간다며 슬픈 눈망울 하겠죠. 다른 PM들은 유사한 케이스에 대해서 이렇게 처리하셨다는 다소 쪼잔한(...) 설득 방법도 씁니다.
이번엔 잘 설득했지만, 다른 프로젝트에선 아닐 수 있습니다. 케이스가 비슷해 보여도 조건이나 상황이 다를 수 있고요. UX 라이터는 원칙과 일관성을 한 손에, 이 프로젝트와 케이스를 다루는 유연성을 다른 손에 쥐고 문제를 마주합니다.
사용자의 편이기도 하고, 프로젝트 팀의 편이기도 한 누군가로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