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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Dec 08. 2015

불편한 시위 문화,  이제는 바꿔야 한다

썸day 아홉째 날

신발 2만여 켤레가 프랑스 파리 레프블리크 광장에 줄지어 늘어섰다. 테러를 명분으로 시위와 행진을 금지한 프랑스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이자,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힘을 합쳐 나아가는 인류 발걸음의 상징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이 시위는, 허나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매스컴과 SNS를 중심으로 현장 사진과 메시지는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지난 11월 29일 열린 이른바 ‘신발 시위’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한편 지난 11월 14일,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제1차 민중총궐기대회는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규탄하고 노동시장 개혁 5대 법안을 저지하자는 기치를 내걸자 시민 13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늘 그랬듯 규탄대회 후 행진이 이어졌다. 허나 그 끝은 온전치 못했다. 일부 시위대와 경찰 간에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언론사들은 이때의 영상과 사진들을 무차별적으로 배포했다. 그날 모인 시민들의 염원과 용기 있는 행동을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사실 나 또한 그들의 편에 서 있다. 허나 시위는 명백히 실패했다. 남은 건 ‘폭력 시위’와 ‘과잉 진압’을 위시하는 평론가와 정치꾼들의 설전뿐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메시지의 자리를 폭력이 대신해서는 변화도, 진일보도 이뤄낼 수 없다. 지난 5일 개최된 제2차 민중총궐기대회 참가 시민 수는 5만여 명. 1차 대회에 비해 반 이상 줄어든 숫자다. 그 사이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감히 말하건대, 문제는 시위 문화다.

 



용어와 형식부터 고쳐야 한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 ‘내가 반드시 저기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부 시민들은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이야기의 방점은 문제의식은 있으나 행동하기 주저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찍혀 있다. 투쟁‧궐기‧박살 등 과격한 단어 선택과 자극적인 색깔‧문장으로 도배된 수십 기의 깃발은, 시민들의 시위 참가를 막는 주원인이다. 단상에 선 시위 주최자들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메마른 구호는, 안 그래도 잃은 것 많은 대중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프랑스 파리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듯 오늘의 시위 문법은 ‘공감’과 ‘평화’다. 격동의 시기였던 80년대, 그 시절에 먹혔던 방법으로는 2015년을 살아가는 대중을 설득시킬 수 없다. 시위대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는 작금의 대한민국을 바꿔나갈 수 없다.


메시지 전달법 또한 바꿔야 할 대상이다. 1차 대회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일어났다. “청와대로 가자!”는 누군가의 구호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누가 옳고 그른지의 논쟁을 떠나, 이쯤에서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충돌로 인해 어느 쪽이 더 큰 손해를 봤는가? 단연코 시위대다. 이때의 충돌로 인해 2차 대회 참가자 수와 시위대의 운신의 폭이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평화 시위였다고는 하지만 메시지는 힘을 잃었고, 그저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하는 분위기뿐이다. 정부가 여론을 묵살했든,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든, 언론이 편파 보도를 했든, 어쨌든 간에 대회 주최 측은 그들 손에 놀아나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청와대 앞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시위의 목적인가? 거기에서 진을 치면 정부의 태도를 급변시킬 수 있나?


결국 자승자박이다.

 



이 정도 다쳤으면 됐다. 더 이상 다치면 회생하기 힘들다. 한순간 치기를 부리기보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감을 중요시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와 행동 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메시지를 집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들의 지지를 얻고 시위대의 메시지가 힘을 얻는다. 메시지가 공감대를 불러일으켜야 대한민국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힘이 생긴다.


오늘의 대한민국 시위는 응당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쓰러져가는 시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좋은 뜻을 품고 나온 시민들이 왜 봉변을 당해야 하는가? 왜 이들이 외치는 메시지가 양측 충돌 뉴스에 가려져 외면 받아야 하는가? 정의를 외치고도 왜 욕을 먹어야 하는가? 이 크나큰 희생은 과연 누굴 위한 것인가? 수없는 물음표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뼈를 깎는 심정으로 외친다.


80년대를 풍미하던 시위 주최 측의 아집을 이제는 버릴 때가 왔다.

불편한 시위 문화는 더 많은 참여와 공감, 올바른 대한민국을 위해 단연코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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