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day 스무 번째 날
기분 더러운 아침이었다. 이 세상에서 무서워하는 세 가지가 사람, 돈, 곤충인데 그중 하나가 내 영역을 침범해 있었다. 땅벌처럼 생긴(그러나 땅벌이 아닐 수도 있는), 다리 여섯 달린 그것이 내 방 테라스 방충망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크다. 어떻게 들어왔지? 물리면 어떡하지? 징그럽다, 무섭다! 녀석은 직사각형 나무판자(로 보이겠으나 우리에겐 침대라 불리는)에서 벌떡 일어나 커튼을 촥 치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두어 발 물러나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가 무서웠겠지만, 나는 방충망에 대롱대롱 매달려 좌우를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검지 한 마디 반 크기의 눈 쭉 째진 녀석의 뾰족한 꽁무니가 치 떨릴 만큼 두려웠다.
놈을 어떻게 처단할까, 일 분여를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놈은 나를 죽이기 위해 방충망 위를 저토록 분주히 기어 다니는 게 아님을. 녀석은 바깥을 갈구하고 있었다. 저 햇볕 쨍쨍한, 그리하여 나 같은 집돌이는 반 발자국조차 디디기 싫은 후텁지근 저 곳이 녀석에게는 집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낮은 포복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살그머니 방충망을 열었다. 놈의 탈출구가 한 뼘쯤 열렸다.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녀석이 그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가라, 독침붕! 너의 자유를 향해!
텔레파시가 통한 게 아니었다. 창틈으로 향하던 놈이 돌연 방향을 바꿔, 마치 반환점을 돌듯 반대쪽으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네 놈은 정녕 나를 죽일 생각인가?” 따위의 얼빠진 중얼거림을 늘어놓다가 정신을 차리고 한 뼘을 더 열었다. 이제 네 출구는 두 뼘. 이 정도면 당연히 알아채겠지. 녀석이 그곳으로 발을 놀렸다. 또 반환점을 돌았다. 이제는 반쯤 열어젖혔다. 또, 또 아니었다. 패닉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그러다 또 한 번 깨달았다. 놈은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못 나가고 있었다. 방충망과 출구 사이의, 삼 센티미터는 될까, 그토록 좁은 창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유리에라도 가로막힌 양 말이다. 힘이 쭉 빠졌다. 유리컵과 책 한 권을 들었다. 녀석을 컵으로 포획해 책으로 입구를 막았다. 방충망 너머 자유의 공간으로 놈을 옮긴 뒤 책을 열었다. 그제야 녀석은 내 방을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똥 밟고 죽도록 고생했다는 듯, 한 치 미련 없이.
기분은 더러움을 넘어 엉망진창으로 나아갔다. 놈 때문이 아니었다. 놈이 고작 삼 센티미터 창틀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 그 순간, 놈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놈과 나와 인간이 동급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손바닥에 죽고 말 미물과 내가 왜 같은 레벨이어야 하느냐고 성내지 마시라. 녀석은 정확하게 당신, 그리고 나와 같은 레벨이다. 적어도 프레임과 마주한 그 순간만큼은.
녀석이 마주한 삼 센티미터 창틀은 보이지 않는 프레임이 되어 이십사 시간 우리를 옥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셀럽, 문재인만 봐도 그렇다. 문재인도, 트럼프도, 미군도, 국군도, 그네들 나라와 우리들 나라 국민도, 사드가 북핵을 막는 데 효용가치 제로임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은 북한이 아이씨비엠을 쏘자마자 사드 네 기를 추가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임시’라는 꼬리표가 붙긴 했지만, 이제 사드의 한반도 상주는 기정사실이다.
참고로 나 ‘문빠’다. 하지만 이번 결정만큼은 결코 납득할 수 없다. 일견 그 심정은 이해가 된다. 문재인은 프레임이 두려웠던 것이다. “북한이 저렇게까지 도발하는데 대화만 요청하다니, 역시 문재인 ‘종북좌빨’이구만!” 이런 소리 듣기 싫었던 거다. 지난 사 년간 누구보다 뼈저리게 프레임에 당한 문재인이다. 그렇기에 사드를 끌어들여서라도 종북좌빨 놀음하는 일부(라고 쓰고 지극히 비정상적이라고 읽는) 비난 여론을 피하고 싶었던 그 마음 잘 알겠다. 그러나 감정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전혀 아니다. 문재인은 프레임을 정면 돌파했어야 했다. 창틀이 두껍게 느껴졌다면 방충망을 뚫어서라도 프레임에서 탈출했어야 했다. 그리고 외쳤어야 했다. 한반도를 배경으로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대화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전쟁의 포화를 피하고자 하는 행동이 종북좌빨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불리겠노라고.
과연 프레임은 문재인만 괴롭히는 것일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일상을 사는 인간은 모두 프레임의 피해자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프레임의 감옥에 갇혀 있다. 학생이어서,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 직장을 다녀서,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어서, 도전하기 힘든 나이여서, 어쩔 수 없어서, 겨우 이게 나여서. 이런 것들이야말로 종북좌빨보다 무서운 프레임이다. 나를 내가 아니게 만들며, 무언가를 꿈꾸고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시정잡배다. 나를 자유로 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삼 센티미터 창틀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은 또한 프레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속하지 않은 집단을 급식충, 개저씨, 김치녀, 틀딱충 따위의 혐오와 조롱 가득한 한 단어로 정의하려는 못된 습성을 갖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타인을 향한 혐오 프레임은 동서양, 인종, 지역을 막론하고 어디든 상존한다. 나를 옭아매고 남을 조롱해서 얻을 거라곤 알량한 우월감과 치졸한 대리만족감, 다른 집단의 이쪽을 향한 반사적인 증오와 이로 인해 파생되는 파괴적인 반목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한 마디 반만 한 벌레만도 못한, 동급 그 이하의 어리석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 점을 일찍이 깨달았기에, 소설가 김영하는 ‘인간이라는 작은 지옥’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끄적거리는 나 또한 수십 개의 프레임, 그 교집합의 어느 한 지점에 겨우 발 딛고 있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프레임에 갇힌 방충망 위의 놈의 심정을 느낀 순간, 망설임 없이 컵을 가져와 녀석을 사로잡은 이유다. 바로 그 동질감 위에 서고 나서야 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프레임 속에 갇힌, 혹은 프레임 안에 스스로를 가둔 놈과 우리가 참 안 돼 보여서. 어딜 가든 프레임의 횡포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나와 네가 하도 불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