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공개수업 참관을 갔다. 집과 가족의 종류가 학습 주제였다. 집의 종류도 참 여러 가지다. 아파트, 한옥, 기와집, 빌라 등등. 거기에 못지않게 가족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확대가족, 핵가족, 한부모가족, 다문화가족 등등. 2학년 어린 학생들에게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되었지만 가족 모습의 그림과 사진을 보고 척척 대답하는 것을 보니 대견스럽기도 하다. 선생님은 가족을 설명하면서 관련된 동화책을 함께 소개한다. 한부모와 다문화 가족에 관한 동화책이다. 가족의 형태에는 사람의 생김새만큼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알아가는 수업이었다. 엄마, 아빠와 형제로 이루어진 가족만이 아니라 엄마만 있는 가족도 있고 엄마나 아빠가 외국인인 가족도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수필 가운데 아직도 기억 나는 구절이 있다. ‘평범이 진리이다. 평범한 것이 위대하다!’ 중학생 때로 기억되는데 그 때는 의미 심장한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평범한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지?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인생이라는 험난한 항해길을 헤쳐오면서 이 말이 진리였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하는 것이 누구나 다 하는 소소한 일로 생각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평범한 게 아니다.
그러나 막상 그 소소한 결혼을 할 나이가 되자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해 양가 어른들을 만나는 것,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것까지 쉬운 게 없었다. 결혼은 어찌어찌 하였다쳐도 아이를 낳는 것도 험난한 일 중의 하나였다. 주위에는 의외로 간절히 원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결혼 중간 중간에는 정말 이혼을 확 해버리고 혼자 살고 싶은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아이가 아프거나 혹은 내가 아프거나 해서 무탈하게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를 몸으로 체감하였다.
이제 딸들이 다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되니 생각과 걱정이 많아진다. 고집 세고 자기 주장 강한 딸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저렇게 성격이 강해서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경망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나 같이 개성이 강한 딸들이 과연 결혼은 할 수 있을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혼을 하지는 않을지? 덜컥 이혼이라도 해서 집으로 세간살이를 이고 쳐들어온다면 과연 내 기분은 어떨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오래 전 봤던 외국 영화에서 딸이 혼전 임신을 했는데도 엄마는 화를 내지도 않고 축북을 해주던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은 아이를 낳아서 건강하게 길렀다. 물론 남편도 없이 말이다. 저게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까? 외국이니까 그렇지! 남의 일이라 생각되니 조금 충격은 받았지만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감동도 받았다. 또 요즘 인기리에 반영되는 드라마에는 고등학생 부부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아이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다 결국에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임신을 했지만 임신을 했다고 차별받지 않는다는 학생인권조례의 규정대로 학생의 신분도 계속 유지된다. 티비 예능에는 고딩 엄마와 아빠의 좌충우돌 육아 이야기가 버젓이 방영된다. 예전에는 평범하지 않다고 배척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공영 방송까지 타는 시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등학생의 육아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증거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유명 연예인이 정자를 기증 받아 아들을 출산한 사실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그 귀여운 사내 아이는 티비 육아 프로그램에 엄마와 함께 고정 출연 중이다. 예전에는 평범하지 않아서 배척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서서히 인정되며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평범하지 않은 게 뭐 어때서요?
이뿐만이 아니다. 이혼을 하고 엄마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예능 프로그램이 대박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이혼을 하면서 혼자 육아를 감당하던 엄마 연예인은 각종 광고의 모델이 되어 더욱 바쁘게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이혼이나 한부모가족 혹은 혼전과 혼외 임신이 손가락질 받으며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평범한 것에 대한 사회적 암묵적 합의 후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죄인 아닌 죄인처럼 숨어서 살던 시대는 이제는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연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범이란 무엇일까? 오래된 관습이 정해 놓은 평범이라는 굴레에 우리들은 손과 발이 묶여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평범이라는 감옥의 창살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남들과 조금 다르게 산다고, 평범하지 않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정했는지 개념의 기원과 정의도 모호한 평범이라는 잣대로 나의 삶을 난도질해온 것은 아닐까? 일부러 평범이라는 틀에 나의 사지를 끼워 맞춰 구겨 넣느라 나의 인생은 기형이 된 건 아닐까?
영화 소공녀에서 돈 많은 남자들을 상대로 접대부 생활을 하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채 임신을 한 젊은 여자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헤픈 여자예요!’ 그러나 주인공은 이렇게 되묻는다. ‘헤픈게 뭐 어때서요?’ 그렇다. 이제는 평범이 진리라고 외치기 전에 이렇게 되묻고 싶다. ‘이혼한게 뭐 어때서요?’ ‘결혼 안 하고 임신하는 것이 뭐 어때서요?’ 이제는 평범의 기준을 바꿀 때다. 평범하게 살려고 그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가 되고 결혼은 기피 대상이 되어 버렸다. 평범하지 않아도 좋다. 평범하지 않은 게 뭐 어때서요? 그냥 나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딸들아! 엄마는 우황청심환을 먹어가며 다 받아줄 준비를 열심히 하겠다. 평범하지 않은 모든 것을!
<나로 살 결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