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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 Jan 04. 2019

[쉽게 읽는 철학] 르네 지라르:
현대 사회의 욕망

나를 욕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프랑스, 문학평론가, 전 대학교수 / 1923-2015


르네 지라르


주요저서


 지금의 사회를 살다보면, 왜 그런 사회가 형성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늘 하게 된다. 특히 왜 이렇게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새롭게 바라고, 늘 더(more)를 바라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하는 공부가 '국제교육개발'인 것처럼, 늘 개발-발전(Development)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된다. 


 르네 지라르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 안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이론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이것은 지금의 사회와 많은 문학작품 그리고 영화를 해석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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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삼각형(Désir triangulaire)

 과거에는 욕망(Desir)의 주체는 일대일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프로이트도 그렇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나라는 주체가 명품가방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는 '매개자'라고 불리는 제3의 무엇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즉, 내가 있고 욕망의 대상이 있고, 다른 매개자(중개자)가 있다. 욕망의 도식은 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인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블로그 [디오니소스에 의한 파토스적 사고]의 [르네 지라르의 욕망이론]


 즉, 인간의 욕망은 모방욕망이라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있어서 욕망은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이것은 제3자에게 영향을 받은 욕망이다. 나에게 욕망대상을 욕망하게 만든 무엇 혹은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모두' 모방욕망이며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제3자에 의해 지시되어야 한다.


 따라서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모든 욕망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요구-욕구besoin,needs=욕망) 예를 들어 보면,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은 욕구(필요)이다. 욕망은 그 필요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예를 보자. 가방은 필요하다. 즉 욕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샤넬가방을 사고 싶어한다. 단지 욕구(필요)로 가방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갈망하는 것이다. (교환가치-사용가치=욕망) 또 다른 예를 보자. 가로수길의 비싼 브런치를 사용가치로만 계산하면 5천원 가량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만원을 지불한다. 그 나머지는, 욕망의 몫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욕망에 돈을 지불하면서 살아간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합리적이지 않다. 고전경제학자들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주고 받는다고 생각했다.(사용가치에 의해서) 그러나 실제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경제가 단순히 주고 받는 형태가 아님을 가장 먼저 인지한 사람이었다. 고전 경제학에서 화폐는 단순히 매개체이지만, 마르크스는 볼 때 인간은 화폐 자체를 욕망하게 됨을 인지한다.


(공산주의의 실패의 원인은 인간의 욕망이 계산되지 않았다는 것이 한 몫 한다. 필요만 채워진다고 해서 다 만족하고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욕망은 형이상학적인 욕망이다. 상대가 소비하는 물리적인(physique)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는 그 사람의 모습metaphysique의 모습을 욕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사용가치가 아닌 잉여의 가치인 '욕망'을 통해서 작동한다. 필요한 것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남기고'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늘 '남기길' 원하기 때문에 빈부격차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딘가에서 제 값을 안 치르고 가져와야만, 즉 누구든지 희생자가 있어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의 멋진 복지제도는 식민지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욕망이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은 낭만적인 거짓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중개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문학작품들을 '소설적 진실'이라고 하였다.   




 그는 일례로 돈키호테의 욕망을 들었다. 돈키호테는 전설적 기사인 아마디스를 흠모하고 선망하여 그의 행적을 모방하려고 한다. 이 경우에 돈키호테의 욕망 대상은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일이다. 이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모델이자 중개자를 통해서 촉발된다. 그러나 아마디스는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현실적으로 그와 경쟁할 수 없고 마음속으로만 경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돈키호테의 욕망은 주체, 모델 그리고 욕망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철학, 욕망을 마주하다)   


여기서 매개의 두가지 종류를 보자.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1)외적매개에 속한다. 매개자가 주인공의 세계 밖에 있다. 매개자가 주체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에 뛰어넘을 수 없다. 주체는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뛰어넘을 수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마치 불교신자가 붓다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기독교인이 예수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2)내적매개는 그 주체자가 내가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인 경우이다. (주체와 매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둘 사이에 차이가 사라질수록 주체와 매개자는 점점 구분할 수 없게 되며, 결국 주체에게 매개자는 자신과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는 경쟁자가 되어 버린다.) 이런 경쟁자의 존재는 주체의 욕망을 가속화 시킨다. 주체가 매개자를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둘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매개자로 삼는 '상호 매개'에 빠지게 되고, 둘은 서로를 모방해 감으로 둘 사이의 차이는 점점 소멸된다. (무차별화)동일한 대상을 원하는, 차이 없는 두 존재는 끝없는 경쟁과 증오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을 낳게 되는데, 공동체 차원으로 확대해 보면 이러한 두 존재의 양상은 무수하게 증가하게 되며, 마침내 공동체 전반으로 파급되어 공동체 전체가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


참고 : 시기Imviere : 적대심을 가지고 바라보다. 내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 질투jelosus :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남과 공유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 


 이러한 무차별화는 개인의 정체성을 약화시킨다. 자신의 존재적 위상을 위해서 모방하였는데, 나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 남은 갈등은 증폭된다. 지금 현대사회는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는 더 잘살고 있지만 과거보다 더 많은 짜증 속에 살아가고 있다. 모방이 부추기는 사회에서 내가 따라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따라 한다고 해도 나의 차별성은 삭제된다. 그러면서 갈등이 발생한다. (헬조선 담론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모방 경쟁' -> '차이 소멸' -> '전염된다' -> '집단 전체의 위기'
차이의 소멸 -> 경쟁적 폭력 야기 -> 전염되어 -> 차이 소멸이 더 심화된다.   


 지라르는 이런 공동체의 위기가 닥칠 때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보았다. 희생양 매커니즘이란 공동체가 어떤 존재를 희생시킴으로써 공동체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 가는 희생 제의 과정이다. 희생 제의는 차이의 소멸로 생성된 극단의 무질서와 폭력의 에너지를 일정한 방향으로 배출시키는 일종의 '대체 폭력'으로, 위기에 빠진 집단의 내부적 폭력을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희생 제의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공동체 집단이 그들 내부의 만연한 폭력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알아서는 안되고 2) 위기의 원인이 애초에 희생양에게 있었다고 실제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희생양으로 선택하는가? 희생양은 1)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하며 2) 그러나 주변적 인물이어야 하고 3) 또 다른 폭력을 유발한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존재들은 이방인, 전쟁 포로, 짐승 등 '타자'이거나 '타자로 만들어진 존재'의 성격을 가진다.


 이제 사회를 들여다보자. 왕따 문제는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심각한데 (그렇다는데 확인된 바는 아님), 모든 학생이 같은 옷과 같은 머리를 해야하는 것은 차이의 상실을 유도한다. 이 상실이 집단에서 표출되는 방식이 왕따라는 희생양 메커니즘인 것이다. 또한 퇴임하는 대통령은 아주 쉬운 희생양이다. 항상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지라르는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통해 다른 폭력을 제압하는 박해를 은폐하려는 시작에서 쓰인 텍스트를 '박해 텍스트'라고 한다. 지라르가 예시로 제시한 <현자 아폴로니우스의 이야기>를 보자.   


 "에페소스라는 도시에 페스트가 번지자 무질서와 혼란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현자 아폴로니우스에게 페스트를 낫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아폴로니우스는 불쌍해 보이는 거지 하나를 '페스트의 악령'이라며, 사람들에게 그를 향해 돌을 던지라고 명령한다. 처음에는 거지에게 돌을 던지기를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아폴로니우스의 명령이 계속되자 하나둘씩 돌을 던지기 시작하고, 돌에 맞은 거지가 분노의 눈빛을 보이자 악령이 틀림없다며 모든 사람이 거리낌 없이 돌을 던지게 된다. 아폴로니우스가 돌에 맞아 죽은 거지의 시체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돌무더기를 헤치고 시체를 들어내자 그 자리에는 커다란 짐승 하나가 죽어있었다. 이로 인해 페스트는 끝이 나고, 사람들은 페스트의 악령이 죽은 그 자리에 수호신 헤라클레스의 흉상을 세워주었다." 


 지라르는 신화적 텍스트에서 '페스트'는 주로 모방욕망에서 발생한 갈등의 메타포라고 해석한다. 이 이야기에서 '거지'라는 약한 희생양이 선택되었고, '커다란 짐승'이 죽어있었다는 왜곡작업이 일어났으며, 나중에 '수호신 헤라클레스의 흉상'을 세움으로 신성화 작업도 이루어졌다.


 갈등과 위기의 원인으로 여겨졌던 희생물이 희생당한 뒤, 즉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 뒤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단합을 통해 희생물은 역설적으로 사회를 위기에서 구원하고 화해를 가져오는 존재로 신성화 된다. (중략) 자신들의 폭력이 근거 없는 폭력이었다는 사실, 무고한 자에 대한 폭력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 희생물에 대한 두 번째 변형, 즉 신성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이 작업에 참가하여 실제로 희생물을 신성한 존재로 받들게 되는 것이다. (참고: 르네지라르_김모세)   


르네 지라르는 마지막으로 유대-기독교의 성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희생양의 선택은 적절했다. 나사렛이라는 변방 마을 출신의 한 청년, 스스로 선지자인 척하며 어부, 세리 등과 같은 주변적 인물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니는 청년에게 희생양의 역할을 맡기는 일은 너무나 간단하다. 문제는 이 희생양에게 집단의 모든 갈등의 책임을 떠안기는 것, 즉 유죄화 작업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예수라는 청년은 유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폭력을 한 데 모으기에 적절한 언행을 일삼는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쉽고 더 완벽한 조건을 갖춘 희생양도 드물 것이다. 공동체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자체로 여러 갈등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에게 민족의 해방자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청년은 정치적 해방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이 청년에게 가졌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한 가지 죄명을 덧붙인다면 간단하게 만장일치적 폭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일신교와 선민사상에, 특히 오랜 세월에 걸친 율법주의에 물들어 있는 이 군중들에게 신성모독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사탄은 다시 한 번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한다. 이번에는 그가 한 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쉽게 일이 진행되었다. 군중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희생물이 된 존재가 스스로 사탄이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주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사탄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라는 청년의 십자가 처형이 자신의 왕국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탄의 계산을 철저히 좌절시키게 될 것이다." (참고: 르네지라르_김모세)
르네 지라르 [희생양] 의 표지 사진


 르네 지라르는 성서와 신화의 매커니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밝힌다. 성서는 집단적 폭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희생양을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폭력의 책임이 박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폭력의 책임을 은폐하는 신화들과는 다르다. 게다가 예수는 박해자들에 의한 신성화 작업을 거치지도 않는다. 그는 스스로 부활한다. 그리고 박해자들을 용서하기에 이른다. 예수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음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해체시킨다.


 지라르는 우리가 묵시록적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유대 기독교 성서 이후로 희생양 메커니즘이 알려졌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이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을 드러내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방욕구에서 비롯된 갈등과 폭력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에 쉽게 악순환의 고리에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을 좋은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좋은 모델'을 예수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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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형이상학(形而上學 · Metaphysics)으로 번역되는 영어 낱말 "메타피직스(Metaphysics)"는 그리스어의 메타(meta: 뒤)와 피지카(physika: 자연학)의 결합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였다.[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1] 그리고 라틴어 의 역어로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다른 정의로는, 형이상학은 사회의 근본 체계, 사회 현상, 모든 지식들 또는 인류 대다수에게 그보다 나은 지식일지라도, 그것들의 근원은 변증된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개별적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념이기도 하다.   


* 본 글은 개인적인 생각과 해석이 들어간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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