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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 Dec 21. 2022

믿는다는 것

상상 속에 살기로 합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상상하지 않나요? 내가 바라는 나의 미래, 내가 소망하는 이 세상 같은 것을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 횟수가 줄어들고 그 상상력의 깊이가 좀 얕아질지는 몰라도, 여전히, 때로, 우리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꿈꾸며 살아갑니다. 상상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이지요.


    때로는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왜 신을 믿나요? 수많은 답이 있겠지만, 저는 꿈이 있어서 신을 믿는다고 대답해보겠습니다. 허수경 시인은 썼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착각을 사랑한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저는 살짝 바꿔서 써보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를 좋아한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믿는다는 말 자체는 증명할 수 없는 것에 향해있습니다. 실재한다면 그것은 믿는것이 아니라 보거나, 듣거나, 그렇게 감각하는 것이겠지요. 네가 내 눈앞에 서있다면 그것은 서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것을 보고 감각할 뿐입니다. 믿음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환상적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리 모두는 살면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믿습니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많이 배운 사람, 적게 배운 사람 할 것 없습니다. 불안이 많고 의심이 많은 사람조차도 때로는 믿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모두 환상의 세계 하나쯤은 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과감한 착각, 그 놀라운 상상. 우리는 그런 것들을 때로 사랑합니다. 당신이 과감히 빠지기로 한 상상의 세계는 무엇인가요?


    그 때가 되면 눈 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들의 귀가 열릴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물이 솟고, 사막에는 시냇물이 흐를 것입니다. (35장)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새끼가 함께 먹고, 어린아이들이 이 동물들을 돌볼 것 입니다. (…) 젖먹이 아이가 독사 곁에서 놀고, 어린아이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악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11장)


Holy Mountain III (1945) by Horace Pippin


성서의 이사야서에 적혀있는 ‘신이 도래한 때’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글을 쓴 이사야 선지자라는 사람은 이런 세상이 올 수 있다고 믿었을까요? 그러니까, 환상의 세계로 들어갔을까요? 적어도 저도 이 상상을 정말 좋아합니다. 성서가 보여주는 신의 나라에 대한 상상이 참 어여뻐서 저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상은 실재하지 않아서 ‘상상’이라지만, 세상은 상상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왔습니다. 대단한 상상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맛좋은 음식에 대한 상상, 곧 떠날 여행지에 대한 상상, 나를 더 편하게 만들어 줄 물건에 대한 상상. 너를 사랑하겠다는 상상, 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상상. 이런 아주 작은 상상들이 모여 세상을 만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상상하고 믿으면서 한걸음씩 내디뎌 왔기 때문입니다. 이 재료를 이것과 함께 먹으면 맛있겠다는 상상들은 수많은 요리법을 만들었습니다.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상상은 비행기를 만들었고,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하겠다는 상상이 SNS를 만들었지요. 아빠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상상이 지금의 당당한 나를 만들었고, 너를 사랑하겠다는 내 마음은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목정원 작가는 극을 보는 관객들은 무언가를 믿는 체하며 앉아있다고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극의 전개는 (특히 고전극들은) 현실에서 절대 없을 일들이 많으니까요. 전형적인 권선징악, 선이 승리하고 악이 망하는 이야기. 그 극적인 스토리라인을 보면 우스울 법도 한데 수많은 사람들은 집중해서 극을 봅니다.


 수많은 이들은 자발적으로 거기 참여하기 위해 그토록 긴 세월 극장을 찾아왔다. 이 생각을 하면 코끝이 찡해지는데, 왜냐하면 누군가 ‘믿는 체 하려는 것’은 결국 그가 ‘믿고 싶은 것’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 아마도 나로부터 먼 것, 멀어서 찬란한 것. 그것을 꿈꾸게 해주는 데 본디 예술의 임무가 놓여 있던 것은 아닌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p146>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상상할지 마음대로 골라보면 어떨까요. 혹은 멋진 상상을 누군가가 곁에서 하고 있다면 살짝 빌려오는 것도 좋겠습니다. 저는 성서의 상상이 좋아 그것을 빌려오기로 했습니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기막힌 상상, 부자의 수백억보다 가난한 자의 천원이 더 귀하다는 상상, 나그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옷을 입히는 것이 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그런 상상들이 저는 정말 좋습니다.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크리스마스입니다. 마구간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나를 사랑한다고 선언한 신이 황금열차를 타고 온 것이 아니라, 뉘일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그러니까 모든 이들의 곁에서 태어났다는 상상이 좋습니다. 고작 목수였던 그가, 모든 죄를 가져갔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가 이 땅에 와서 선언했다는 세상이 실제로 다가오는 상상을 해봅니다. 좋아요, 나는 그 상상 속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게 나의 오늘의 믿음입니다.


The Holy Family of the Streets (2019) by  Kelly Latimore
Dorothy Day and The Holy Family of the Streets (2021) by Kelly Lati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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