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갈라파고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갈라파고스)
본 글의 위의 책의 내용(2장)을 정리하고 약간의 의견과 질문을 덧 붙인 글입니다
2016년 하반기부터 2017년 상반기까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일명, 촛불 혁명)이 거셀 때, 한국에서 핫하게 떠오른 철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한나 아렌트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언급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몇 년 동안 케케묵었던 정부의 부패를 설명하기 위해 많이 인용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나도 아렌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사실 아렌트에 대해서는 악의 평범성 외에 알려진 내용이 별로 없었을뿐더러 그녀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상술한 것으로 그 시대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하면 원서를 통해서 '악의 평범성'을 이해하기는 꽤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것저것을 더 읽어보고, 특히 그녀의 에세이 [교육의 위기]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악의 평범성'은 그녀의 사상의 아주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교육과 발전(Development)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을 통해 나의 탐구에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까 시작되어서 처음 펴 들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덮고, 그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찾아든 책이 바로 나카마사 마사키의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이다. 역시 이런 책은 일본에서 많이 나와서 번역되어 있다 (한국도 더 많아졌으면...ㅠㅠ) 이 책은 아렌트의 대표 저서의 대표적인 사상을 4장에 걸쳐서 소개하고 있다. 일대일 대응은 어려우나,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장. '악'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 전체주의의 기원 (1951)
2장. '인간의 본성'은 정말 훌륭할까? > 인간의 조건(1958)
3장.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 질까? > 혁명론
4장.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될까? > 정신의 삶
장의 제목은 책에서 제시된 것이고, 옆에 쓴 책 제목은 내가 생각할 때 아렌트의 저서 중 해당 장의 내용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판단하는 부분이다.
본 글은 2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세계대전을 경험한 아렌트는 인류의 이 어마어마한 재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했던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한 '휴머니즘'은 인간 본성을 긍정하고 찬미하였다. 이러한 서구적 '인간성'은 결과적으로 나치즘을 막지 못했다.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 사건을 해명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녀는 '후마니타스'적인 것을 찾아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은 생물로서의 사람이 아닌 공동체를 구성하여 온전히 자기 몫을 다하는 동료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p88). '인간성(휴머니티 humanirty. 라틴어로는 후마니타스 humanitas)'은 '자유인'으로서 '폴리스'의 '정치'에 관여하는 시민이 몸에 익혀야 할 기본적인 교양이었다. 책 <인간의 조건>은 고대의 도시국가, 정치적 공동체에서 '시민'을 기준으로 형성된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사상적으로 분석해낸 책이다(p88).
아렌트는 '인간'이기 위한 세 가지 조건으로 1) 노동 labor 2) 작업 work 3) 행위 action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 단어들을 기존에 이해하던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혼란스럽다. 아렌트만의 정의가 있다. 노동 labor는 인간의 육체가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만드는 과정이다. 작업 work는 자연환경과는 상이한 '인공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명 유지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작업'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가치를 지니는 가구, 기계, 예술품 등 작품 work을 만드는 활동이다.(*1) 행위 action은 다른 사람의 정신, 인격에 작용을 가하거나 설득하는 행위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행위 action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인격을 전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것을 '복수성 plurality'라고 말한다. 복수성은 동물의 무리와는 다르다. 복수성은 사람들 사이 in-between라는 공간이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이러한 아렌트의 사상은 전체주의를 경험했던 그녀의 특별함 같다. 그녀는 '다양성' 혹은 '복수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동물처럼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 수단을 통하여 서로 상호작용함으로써 다각적인 관점을 형성하는 것을 행위 action의 핵심으로 본다.
저자는 이 즈음에서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보면, 아렌트가 대중사회에서 원자화된 사람들의 고독이 최종적으로 '복수성'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면 개개인의 존재성이 강해지는 것이 다양성을 강화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어떤 점에서 '대중'사회의 '원자화'된 '고독'한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복수성을 해체' 시킨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리에 대한 탐색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녀가 '복수성(다양성이라고도 이해될 수 있는)'을 '인간의 조건'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복수성은 '행위 action'을 통해서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렌트는 자신만의 '언어관'을 제시하는 데, 해당 글에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녀가 '복수성(다양성이라고도 이해될 수 있는)'을 '인간의 조건'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렌트의 '정치'에 대한 의미를 읽으면서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아주 유명한 문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다. 기존에 이 말은 '사람은 다 정치적이야~'라고 말했을 때 이해되는 약간의 냉소적인 말처럼 여겨져 왔다. 자기의 이해관계를 따지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생각한 '정치'는 '인간다움'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행위 action'를 제시했으나, 그것은 '행위'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교육학적 관점으로 말해보자면, '사유함을 허락하는 교육' 현장에서만 정치적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행위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환경이라는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듣고 나눌 수 있는 환경을 말한다. 아렌트는 이 행위가 고대 그리스의 민주적인 '폴리스'에서 일어났다고 보았다. 물론 이 시대의 폴리스가 상류층-성인-남성에게만 제한되어있었다는 결정적인 한계는 아렌트도 인식하고 있다.
폴리스에서 이 행위가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이자, 지금 우리 사회에 큰 시사점을 주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 '공적 영역 public realm'과 '사적 영역 private realm'이 분리되어있다는 점이다. 앞선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서 언급했 듯, 기존의 '정치'라는 것은 각자의 이익을 가지고 서로 타협하는 수단-도구(tool)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정치'의 의미는 이 폴리스 polis를 위해서 무엇이 선인가(공동선)에 대해서 함께 토론(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서로 대화하면서 상대방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법을 배우고, 이 시간은 바로 '인간다움'을 경험하는 시간이다.(*2)
그런데 이런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가 가능하려면 '시민'들이 먹고 살 걱정이 없어야만 가능하다. 당시에 폴리스의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은 극히 일부였고, 그들이 이러한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자,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act)가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람, 장소, 환대'를 쓴 김현경의 말이 떠올랐다. 비록 이 책에서는 사적 영역에 놓인 소외된 개인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렌트도 이 부분에 그렇게 주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폴리스 영역에서 탄생한 인간성에 주목했을 뿐), 김현경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부여될 공공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가부장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사생활 박탈은 그들이 공공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라이버시의 결여-'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와 공적 공간에서의 배제는 장소 사실의 두 형태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 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사람, 장소, 환대_김현경, p203)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대 그리스처럼 '집'이 '경제'의 단위로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노예도 없다. 그녀는 사회 전체가 노동-생산체제로 조직화되면서 공/사 이분법이 해체되고 이것이 인간 행위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거칠게 표현하면 그냥 모든 게 다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 토론만 가능하게 한다. 아렌트에게 영향을 받은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는 사적 이해를 중심으로 하지만서도 열린 토론을 통해서 시민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시민들의 네트워크를 '시민적 공공권'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근대의 새로운 공공성으로 기능하길 기대했다(p123).
그러나 아렌트는 사적 이해관계를 전제한다면 부정적이라고 판단한다. 한나 아렌트에게 '인간'다운 '행위'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토론하며 다른 사람의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을 배우는 폴리스적 '공공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사회적 영역'에서의 토론은 '복수성'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관점은 참 답답하게 느껴진다. 과연 이해관계를 철저히 제외한 대화라는 것이 지금 가능하냐고 질문한다면, 그건 불가능에 수렴할 것 같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기는 할까?
그렇지만 이것은 어쩌면 자본주의사회가 낳은 비극일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이론에서는 다각적 사고법을 잃어가는 현상을 '소외 alienation'이라고 부른다. 루카치(Lukacs 1885-1971)가 말한 '물상화-나날의 양식을 얻기 위해 기계의 부품처럼 주체성 없이 일하는 노동자가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리고 비인격화되어 자기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현상'과 유사하다. 마르크스와 아렌트는 '노동'을 무엇으로 보는지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으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인간 소외를 낳는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였다.
아렌트는 '사회적 영역'이 확장되고, 소외가 심화되면서 사람들이 '인간'다운 영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말한다. 이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계'로 여겨진다. 여기서 현대적 의미의 프라이버시(Privacy)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경제'를 중심으로 한 빡빡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적 영역'에서 지친 사람이 사적인 공간으로 도망쳐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이 안에서 쉼을 구하는 것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빠져든 나머지 공적 영역에서 '행위'할 의욕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점은 지적한다.
‘민주주의 사회는 하나 거대한 교육기관으로서,
시민들이 끊임없이 자기 학습을 하는 곳이다'
그리스 사상가, 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Cornelius Castoriadis)
참으로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폴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역시 철학자는 이상적이야, 끌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나카마사 마사키는 그녀가 절대 순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의 범위를 확대했던 서구의 시민사회가 '사회적인 영역'에 매몰된 것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사회가 전체주의와 통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을 경계하며 그 부분에 경보를 울리는 것이 아렌트의 소명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여전히 그녀의 말이 이상적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도 그리 말하지 않았나. 자기가 나이가 들고 보니, 예전에는 더 좋은 사회가 이러쿵, 저러쿵 말했었는데 '더 좋은 사회가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라고 생각한다고. (요즘 나의 최애 학자, 바우만)
급 전환이지만... 이것이 교육과 발전에 대한 생각과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지난 1-2년 간의 내 생각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았지만, 나는 기존에 경제성장 혹은 상당히 서구적인 형태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기존의 발전(혹은 개발, Development)이라는 개념에 어떤 다른 상상력이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왔다. 몇 가지 내 마음에 품고 있는 문장은 하나는 '더 많은 존재가 인간으로 여겨지는 사회' 그리고 프롬을 통해서 마음에 품은 '존재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아렌트와 바우만 등을 통해 생각한 '공적영역이 확장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기존의 '노오오력' 담론처럼, 개인이 경험하는 어려움들을 철저하게 개인의 영역에 가두고 그것을 '우리'의 이야기로 전환시키지 못해 온 지난 경험들과 '잘살기'에 매몰되어 '함께 잘살기'를 꿈꾸지 못했던 경험들을 돌아보았을 때 '공적영역'의 확대, 그 자체가 하나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 발전이라면?
교육에서도 계속 이야기되는 것이 결과 중심의 평가가 아니라 과정 중심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도 비슷한 이야기 일 것이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결과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가치관으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계속 습득하며 '인간다움'을 배워가는 현장으로서 교육이 역할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의 모습이라면? 그리고 그 교육이 교실 밖으로 기지개를 켠다면 어떨까?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근 몇 년 동안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지금 내가 담겨 있는 이 사회에서의 삶은, 내가 계속 삭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더 애석한 것은 '열심히' 달리는 데 그렇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노오오력' 할수록 더 삭제되는 이상한 사회. 도대체 그 근원은 뭐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지, 그것이 내 존재와 연결된 가장 핵심 질문 같다.
여하튼 아렌트에게 한 수 배워감!
(*1)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작업 work'을 포함한 의미의 '노동 labor'을 인간의 '유적 존재 Gattungswesen(노동하는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노동을 사회적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는 것(=노동 가치설)이 마르크스주의의 와 애덤 스미스 같은 고전파 경제학의 공통 전제이다 (p94)
(*2) 사실 이 개념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아고라'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 바우만은 다만 바우만은 아고라는 사적, 공적 양쪽의 중간지대로서 아고라를 설정했다. 그리고 사적인 이야기가 '공적인 형태'로 전환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면서 '고립된 개인' '원자화된 개인'이 자기의 문제를 공적인 것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머무는 것에 대한 한계를 지적한다.
1. 아렌트가 제시하는 인간성의 개념은 정치체를 기반으로 구성된 '시민'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국가와 국경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는 시대. 이런 시대에 아렌트의 '시민'개념은 어떤 것을 기반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