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지루하고도 길었던 대학입시를 치루고 신입생의 문턱에 다가갔던 그 해, 봉사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부모님의 삶은 늘 타인의 삶과 끊임없이 관계하며 손길을 주고 받는 모습이었고,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의 삶에 익숙했음은 물론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자연스럽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적혀 있는 무수한 봉사활동 리스트를 살펴보다가, 멀지 않고 공강시간과 맞는 한 곳을 찾았다. 마포구에 있는 ‘한국우진학교’로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학교였다. 봉사활동 첫 날, 나는 우리 반의 세 명의 존재와 만났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를 만났고, 그 아이들의 선생님들을 만났고, 그 아이를 위해 밥짓는 급식소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매주 금요일,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밥을 먹었고, 체육활동을 했고, 양치질을 했다. 사실 밥을 먹고, 체육을 하고, 양치질은 한 건 내가 아니라 그 학생들이었지만, 나는 나도 함께 ‘했다’고 생각한다. 6개월 동안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낯설고도 낯익은 생각이 나에게 남았다.
나는 내가 타인의 삶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해왔었는데, 내 삶의 세계에 지적장애아는 없었다. 지적장애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었고, 지적장애아의 선생님도 없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존재’하지 않았었다. 존재하지만 철저히 나의 세계에서 삭제된 그 존재. 나 뿐일까? 어쩌면 사회에서 삭제된 존재하는 ‘존재들’. 그 뒤로 나는 내가 인간으로 살면서, 수많은 존재들을 삭제한 채로 살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그들과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이진경(2011)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거대한 존재의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들은 나를 바닷속으로 유혹하고 침수케 했다. 그들의 삶을 통해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했고, 또 그들의 삶과 함께할 방법들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기도 하였다. ‘불온한 것들’과의 만남은, 나를 윤리적이고 또 정치적인 존재가 되도록 했다.
이 책이 ‘불온한 것’들에 다가가는 방식은 기존의 ‘착한’ 방식과는 다르다. 보통의 ‘착한’ 방식은, 장애자를 향해 ‘돌보아야 하는’, ‘도와줘야 하는’, ‘배려가 필요한’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로 설명한다. 참 착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극단으로 밀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 빈곤 포르노(poverty porn)이다. 빈곤 포르노란 상업적인 목적 또는 자선행위나 특정 사안에 대한 지지를 늘리기 위해 필요한 동정심을 이끌어내고자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모든 형태의 미디어(서면, 사진, 영상 등)를 의미한다. 특히 빈곤 포르노는 한국에서 후원금을 모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빈곤을 바라보는 참 빈곤한 시선이다. 불쌍한 ‘그-들’의 존재와 그들을 ‘돕는-우리’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생긴다. ‘그들’과 ‘우리-나’는 결코 같은 수평선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먼발치에서 그에게 먹을 것을 던져줄 뿐이다.
그러나 이진경(2011)이 장애자를 대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는 ‘너도 장애자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존재자는 항상-이미 다른 수많은 존재자에 기대어 그것들에 ‘폐를 끼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장애자다. 무언가에 기대어 존재하는 것이 모든 존재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든 존재자는 운명적으로 장애자들이다. 이 경우 장애는 존재 그 자체와 결부된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 장애다. (이진경, 2011, p91)
그는 기존의 ‘정상성’의 개념을 ‘비정상성’의 심연으로 끌어당긴다. 혹은 초대한다. 비정상성을 정상성으로 당기려 해왔던 인류의 노력을 제쳐내고 새로운 차원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는 나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사람,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따위는 착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장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해결되는 듯해 보이는 현상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존재론적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없는 우리는, 돈을 주는 순간 혹은 돈을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폐 끼치지 않는 존재로 스스로를 탈바꿈한다. 그 폐가 ‘교환’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노동자는 장애자 만큼이나 장애자라고 말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된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혹은 ‘돈이 있다’는 폐를 끼치지 않는 존재가 된다’라는 등식도 성립할 것이다. 돈으로 ‘불온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간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너와 나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다. 경계선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불온해지고 나의 존재의 근거는 사라질테니, 우리는 더 죽도록 그 선을 긋는다. 이진경은 그 불안정성의 두려움, 그 불온해지는 것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림으로 오히려 찾아오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가 그렇게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은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와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기서 한 편의 시가 떠올랐다.
"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 봐 두려워 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살아 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 김승희 <제도>
"
이진경은 말한다. ‘금을 뭉개버려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랄라’ 나는 이 시의 ‘랄라’ 라는 단어를 마음에 담는다. 경계의 해체는 두렵다. 나와 다른, 나와 익숙하지 않은, 혹은 ‘우리’와 다른 뜬금없는 불온한 존재들과의 조우는 두렵다. 그러나 ‘랄라!’. 박테리아처럼 가장 ‘하등’하고 가장 보잘것없고 소소한 이 생명체가 인간을 덮쳐 그 모든 탁월성과 위대함을 ‘더러운’ 물로 오염시켜버릴 때, 우리를 눈멀게 하던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빛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날 것이다. 랄라!’ (이진경, 2011, p75)
예전에는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나는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를 말했었다. 그런데 나와 네가 같은 ‘박테리아’임을 느꼈을 때, 그 ‘탁월성’의 밝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드러났다. 내가 존경하여 내 마음에 진동을 주는 이들은, 오늘도 가득 찬 2호선의 열차를 타고 퇴근하는 저 아저씨. 신촌역 부근에서 5년 째 폐지를 줍는 저 아저씨. 신촌역 7번 출구에서 더우나 추우나 쑥갓, 미나리, 배추 등 제철 야채를 파는 노점상 저 할매. 지친 하루에 술 한 잔을 들이키고 내일을 또 살고자 애쓰는 저 ‘평범’한 존재들. 나는 때로 그 존재들의 존재에 마음이 떨린다.
우리는 닮고 싶은 멘토가 있고, 존경하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서 갈 때, 어쩌면 결코 그 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탁월성의 허구를 부수어야 할 것이다. 사자와 양이 함께 뛰놀고, ‘장애자’와 ‘장애자’가 함께 뛰놀고, 수학 잘하는 아이와 수포자(수학 포기 자)가 함께 뛰어놀고, 서울대생과 마이스터고 학생이 함께 뛰노는 곳에는 탁월성의 허구가 없다. 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