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서른다섯, 동갑내기 친구가 생겼다.
정다운과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만났다. 이십 대 중후반에는 각자 서울의 끝과 끝에 살았다. 서울의 남동쪽 끝, 분당에 살면서 IT기획자로 일했던 다운이와 여의도와 목동에 있는 방송국을 거점으로 서울의 서쪽 동네를 전전하며 살았던 나. 정다운의 고향은 부산이고, 나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으니, 학연, 지연 따위 겹칠 리가 없다. 혈연으로 얽힐 사이는 더더욱 아니고- 그 시절 새로운 관계 맺기에 겁이 많았던 나와 달리, 다운이네 부부는 툭하면 사람들을 불러 밥을 해 먹이느라 분주해 보였다. 어느 것 하나 닮은 구석이 없던 우리는 어쩌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함께 일을 했다. 천천히 친구가 되었다.
사실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이가 같다고 해서 꼭 마음이 잘 맞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나이 들어 알게 된 사이일수록 왠지 더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퇴근 후에 잠깐, 일이 없는 일요일엔 오후 느즈막에 만나 구시가지 골목을 걷다가 헤어졌다. 어느 해 초여름인가. 짧은 하늘색 점프슈트를 입고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던 다운이. 나는 이 애가 언제부터 이렇게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걸어왔을까 궁금했다. 멀리 정다운이 보이면 나는 구부정하게 말린 어깨를 한껏 펴는 척을 하다가 그 옆을 따라 걸었다. 한국어로 된 종이책이 생기면 나눠 읽고, 어떤 날은 그들 부부가 해주는 저녁을 얻어먹고 집에 돌아왔다. 동네 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굿즈나 에코백을 사서 하나씩 나눠 가졌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에코백을 사고, 메르세 축제 플리마켓에 갔다가도 에코백을 샀다. 다운이는 어깨끈이 얇고 축 늘어지는 에코백을 좋아했다. 집에 에코백이 쌓여갈수록 우리의 우정도 돈독해졌다. 아무튼 에코백을 사던 시절이었다.
'아무말공작소'의 탄생
그날은 2층에 있는 서점 테라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한국 여행자들은 거의 모르던 장소라, 우리는 현지인들 틈에서 마음 놓고 둘만 아는 이야기를 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날씨 이야기, 어제 본 동네 개 이야기, 요즘 읽는 책 이야기, 햇빛 이야기, 자주 먹는 샌드위치 이야기… 무해한 아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한참을 웃다가 누구 하나 말없이 가만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누군가 너무 말이 없다 싶으면 정원에 있는 레몬트리를 구경하거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거나, 옆 건물 테라스에 나와 있는 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좋다!”
“좋지? 정말 좋네-”
친구의 얼굴 너머로 한껏 물이 오른 담쟁이넝쿨이 바람에 흔들린다. 사라락 사라락. 계절을 느끼는 순간, 나른한 오후의 공기를 깨고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무말공작소 하나 만들까?”
“응? 아무 말을 만드는 곳이야?”
“가끔 이렇게 만나서 아무 말이나 하다가 헤어지는 모임”
“오- 좋은데! 공작소면 소장은 누가 해?”
그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배꼽을 잡았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화의 9할은 진짜 ‘아무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운이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아무 하고나 아무 말이 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날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것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으면 편지를 썼다. 쓰다가 지우고 또 지웠다. 그 편지를 부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멀리서 함께 읽기
IT기획자로 일하던 정다운은 퇴사 후 남미-제주-바르셀로나를 거쳐 몇 년 전, 다시 제주에 터를 잡았다. 벌써 여러 권의 책을 썼고, 매거진 어라운드에 9년째 연재 중이다. 나는 바르셀로나에 남았다. 그 사이 결혼을 하고, ‘외노자’와 ‘경단녀’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분투 중이다. 서른이 넘어 전혀 낯선 세계로 건너와 친구가 된 우리는 마흔이 넘은 지금도 친구다. 다운이는 제주에서,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최근에 정다운과 내가 주고받은 글이 어라운드 AROUND 5월호에 실렸다.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를 함께 읽고 나눈 편지였다. 방송작가로서 글밥을 먹은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영상이 아닌 지면을 빌린 ‘공적인 글쓰기’는 처음이었고, 이건 그야말로 전혀 다른 세계의 글쓰기였다. 편지 한 장 쓰면 된다는 말에 흔쾌히 오케이 했다가 코가 깨졌다. 그래도 정다운 옆에 나란히 이름을 적을 수 있어서 재밌고 좋았다.
“너랑 이렇게 편지로 이야기하는 것 참 좋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그리고 너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내 삶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다운이가 쓴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다.
“우리 이거 계속해볼까?”
그렇게 시작된 멀리서 함께 쓰는 아무 말 이야기. 우리 얘기를 누가 궁금해 하기는 할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올리브 나이쯤 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무척이나 궁금해할지도. 어쨌든 너와 나는 같이 할머니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