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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락 Jan 02. 2024

태풍이 스쳐 지나간 후 남은 것들

미국에서 1년 살기

금요일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오는 게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에 가장 강력한 태풍영향권에 들어갈 것 같았다.

뉴스를 보니 이미 태풍이 지나간 플로리다주 근처의 해안가들은 집들이 물에 잠기거나 부서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아 부디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길, 주차장에 세워둔 우리 차에 아무 일도 없길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비 내리는 소리에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는데, 새벽녘에 화장실 변기에서 꿀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확인해 보려고 일어나 화장실 스위치를 올렸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게 정전인 것 같았다.

아직 해뜨기 전이라 어두운 게 맞지만 왠지 평소보다 더 어두운 것 같아 창밖을 내다보니 도로의 가로등이 모두 꺼져있어 칠흑같이 깜깜했다.

혹시 몰라 준비해 두었던 손전등을 켜고 화장실로 가서 변기를 살펴보았더니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정전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화장실까지 사용할 수 없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내륙으로 올라온 태풍의 세력이 약해져서 바람이 그렇게 강하지 않고 비의 양도 적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다른 집들은 어떤가 Nextdoor에 들어가 보니 우리 구역 어딘가의 전신주가 태풍 때문에 쓰러졌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듀크에너지 측에서는 최대한 빨리 복구를 하겠다고 했지만 4~6시간 정도는 걸릴 거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만 이런 게 아니고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서서히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싱숭생숭한 마음에 잠이 오진 않았지만 최대한 전기를 쓰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었나 보다.

아이가 나를 부르며 외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엄마~ 변기에서 물이 넘쳐요. 엄마~~~"

화장실로 달려가보니 변기에선 물이 역류해서 넘치고 있었고 아이는 그 옆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우선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고 변기뚜껑을 덮었다.

그런다고 역류하는 걸 멈출 순 없지만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흘러나오던 물이 멈추고 변기도 조용해졌다.

"난 그냥 쉬하고 물만 내렸는데.."

"응,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정전돼서 그래. 당분간 변기는 사용하지 말자."

건식이라 배수구가 없는 화장실 바닥은 난장판이 되었다.

고맙게도 뒷수습을 자처한 남편에게 화장실을 맡기고 주방으로 갔다.

'설마 그래도 냉장고는 돌아가겠지...' 했지만 냉장고를 위한 비상전력 따위는 없었다.

최대한 냉장고를 열지 않고 냉기를 유지한 채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냉동실에 있던 아이스크림들은 그때까지 녹지 않고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문을 연 김에 아이들에게 꺼내주었다.

아침부터 아이스크림 뷔페를 맞이한 아이들은 신이 났다.

"태풍 오니까 좋다. 학교도 안 가고 아침부터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래...... 참 좋기도 하겠다.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는 것 같아 뉴스를 찾아보니 태풍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서쪽으로 이동해서 우리 지역엔 바람이 좀 불고 비만 올뿐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전신주가 쓰러졌을까? 그 정도의 바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침을 해 먹으려 해도 전기레인지나 전자레인지조차 작동이 안 됐다.

지난번에 물을 사러 마트에 갔을 때 나는 왜 그 아수라장 속에서 돼지고기 안심을 덩어리째 사 왔으며, 그걸 또 왜 돈가스를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두었을까?

'진짜 정전이 될 줄이야... 이래서 그렇게 통조림들을 싹쓸이해 갔구나.'

태풍에 대비하는 방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아침은 간단히 빵과 시리얼을 먹고 점심엔 휴대용 가스버너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여행 때 쓰려고 중고로 구해둔 가스버너가 그렇게 듬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냉동실 안에서 점점 녹고 있을 고기들이 걱정되었지만 행여 냉기가 빠져나갈까 봐 열어보지도 못했다.


 계속 뉴스를 검색해 보려면 노트북 배터리도 최대한 아껴야 했기에 아이들은 영화도 볼 수 없었고 미처 충전해두지 못했던 게임기의 전원도 금세 꺼졌다.

조용하고도 심심한 토요일 오전이었다.

화장실이 가장 문제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물이나 음료수를 마시지 않아야 했는데, 마트 네 개를 돌며 간신히 구한 물들을 정작 마시지도 못한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리징오피스에 가서 우리 집 화장실의 상태에 대해 얘기도 하고 바깥 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남편이 정전이라 배수펌프가 멈춰서 그런 것 같다며 리징오피스의 화장실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다 같이 나가 화장실을 다녀오며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대로라면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복구하는데 4~6시간이면 된다던 전기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냉장고의 모터가 돌기 시작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컨도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고 방마다 켜둔 전등에도 불이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이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안심이 되었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다행히 고기들은 꽁꽁 얼어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도 괜찮을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덕분에 아이들은 흔치 않은 즐거운 경험을 했으니 그걸로 됐다.

이번 태풍은 예상경로보다 아래쪽으로 지나간 덕분에 밤새 비가 좀 왔었나 하고 지나갈 정도로 영향력이 약했다.

무사히 지나간 건 다행이지만 막상 별 피해 없이 지나고 보니 지난 며칠 동안의 그 전쟁통 같았던 마트들과 휴교까지 한 학교가 유난스러웠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태풍의 경로가 바뀌는 바람에 그린즈버러에 있는 MS언니네 집은 피해가 컸다.

집 주변을 빙 둘러싼 나무들 중 비교적 작은 나무들이 이번 태풍으로 다 뽑히고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놀러 갔을 때 아이들이 뛰어놀았던 뒷마당의 푸르른 잔디밭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에 비로소 이번 태풍의 위력이 실감 났다.


큰 피해 없이 태풍이 지나간 것도 다행이었지만 아이들에게 전기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준 하루이기도 했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컴퓨터나 게임기를 충전해서 사용하던 아이들은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경험했다.

아무 생각 없이 불을 켜다가 "아, 정전이지." 하고, 화장실을 가려다가도 "아, 맞다. 정전이라 못쓰지." 하고 돌아서거나 방전된 게임기를 충전시키려다가도 "아, 정전이구나." 하고 식빵을 구워 먹으려고 토스트기에 넣었다가도 "아, 정전이라 안되네." 하며 맨 빵을 먹어야 했다.

고작 반나절동안이었지만 좀처럼 적응 안 되는 이 불편함이 우리가 전기에 얼마나 의존하며 살고 있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해 준 것 같았다.

나 역시도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마음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살짝 녹아있는 돈가스를 꺼내 튀길 준비를 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어찌나 간사한지  '그래도 미리 만들어 놓길 잘했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게 된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산더미같이 쌓아둔 저 많은 생수는 언제 다 먹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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