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소재를 다루는 다른 방식, 핵소 고지(Hacksaw Redge)
어떤 영화든지 특정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한, 두가지 포맷에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전쟁 자체 즉 전쟁씬에 초점을 맞추든가 아니면 전장에서 피어나는 인류애(혹은 로맨스)를 다루는 방식으로 거의 이분화된다.
Sf라면 어떨까? 보통 지구인이 외계 물체 혹은 외계 생명체를 상대로 싸우는 일을 다루든 아니면 미지의 영역인 우주 속에서 힘겹게 살아돌아오는 인간의 투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번에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Arrival)가 관객들 사이에서 유난히 많이 회자된 이유는 바로 이런 특정 소재가 가질 수 있는 표현의 프레임을 벗어나 색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현했다는 데 있다. 어떤 장르며 예술, 문학이든간에 주류적 흐름(Main Stream)은 안전하지만 반면 신선하지 않고, 반대로 비주류적 흐름이나 표현은 위험하고 낯설지만 때문에 새롭다.
그렇다면 장르의 범위를 보다 한정해서 전쟁 영화라는 특정한 영역으로 한정시켜 이야기를 다뤄보자. 전쟁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Killing'이다. 전쟁에서 그 죽이는 행위에는 어떤 상대에 대한 사적 복수심이나 악의가 없다는 점에서 범죄물에서 다루는 살인과는 다른 의미이다. 그것은 전쟁이기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나의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상대를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하는 행위이지 그 행위에 어떤 사적 복수심이나 원한이 담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전쟁 하면 떠오르는 이 일차원적인 '킬링'의 이미지를 뒤엎고 '구조'라고 하는 'Saving'이나 'Rescue'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어려우며 일반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핵소 고지란 영화의 포지션은 그 자체로 위험하고 낯설지만 새롭다. 적어도 이 영화의 다른 영화적 요소들(이를테면 각본이나 연출, 배우들의 연기 등)이 '영 아니올시다'로 평가되더라도 새롭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전쟁 영화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플러스가 된다.
물론 'new=good'이라는 치환은 위험하지만 말이다.
같은 소재(2차 대전)를 다루는 다른 방식, 실화에 기반한 사실적 묘사와 킬링이 아닌 세이빙에 초점
전장에 나가면서 총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은 죽어도 좋으나 다른 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신념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한 개인의 신념이 조직의 신념과 배치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중요한 전시 상황에서 전장에서 총을 들지 않겠다는 의지는 자신의 전우와 동료들을 지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오도될 크나큰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쫓으면 조직의 배신자가 되어 불명예 제대를 해야하고, 반대로 총기사용을 거부했다는 시인을 하지 않으면 교도소로 가야하니 어느 쪽이라해도 긍정적이지 않다.
데스몬드 도스란 인물이 훈련 중 이 총기 사용을 거부한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것과 같은 상황을 그 어떤 전쟁 영화를 통해서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점이 무척 낯선 동시에 신선하다.
이처럼 데스몬드 도스란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핵소 고지>는 얼핏 범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의 신념을 전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그를 향해 비굴하다 손가락질하며 자신들의 부대에 편입시키지 않으려고 갖은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대원들과 병장, 대령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 데스몬드 도스란 인물을 이해하는 편보다 오히려 한결 쉬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병역 거부자가 아니다. 그는 다니던 회사가 있었고 얼마든지 병역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는 싸우는 게 두려워 회피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싸우는 방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찢겨지고 짓이겨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자신만이라도 그 찢어진 것들을 원상복구 하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입대하는 길을 택했고 그 속에서 총을 들지 않는 길을 또한 택했을 뿐이다. 그는 의무병으로서 나름대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조국을, 그리고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 틀렸다로 해석될 수는 없는 문제임을 데스몬드 도스란 인물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데스몬드가 이처럼 총을 거부하게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세계대전이라는 크나큰 전쟁의 질곡을 통과해야했던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목숨을 부지했지만 절친 3명을 잃었고 수많은 목숨들이 전장의 이슬로 스러져가는 것을 목도한 인물이다. 무공훈장을 두 개나 얻었지만 대신 건강한 정신을 잃었다. 그후 그는 술에 의존하며 일종의 외상 후 장애에 시달린다.
극도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데스몬드의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아들들의 싸움질을 말리기는 커녕 오히려 부추긴다. 데스몬드의 말을 빌리자면 해가 뜬다고 때리고 해가 진다고 또 폭력을 휘두르는 식이다. 게다 이런 그의 폭력적 성향은 아들형제를 넘어 아내에게까지 미친다. 데스몬드가 총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엄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말리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에 기인한다.
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지만 그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주홍글씨처럼 새기며 살게 된 데에는 이런 그의 가정사와 아버지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차대전 당시 최초로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 오키나와 전투(1945.4.1~81일간)
영화 핵소 고지는 이 영화의 제목을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채워진다. 2시간 2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이 실제로 이 핵소 고지 전투씬과 데스몬드가 그의 동료 부상병들을 구해내는 과정에 집중한다.
보여주기식 겉치레와 총탄이 날아가고 사람들이 나가떨어지는 장면을 마치 무협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타일리쉬하게 표현하는 대신 사실적 묘사에 치중한다. 두 다리가 너덜너덜할 정도로 잘려나가고, 머리에 총탄이 박히고, 수류탄에 나가떨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터치는 극적인 요소를 위해 전시되지 않는다.
특히 일본군 대장이 할복하는 씬에서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복시 옆에서 목을 쳐준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 장면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들은 수류탄과 함께 미군을 껴안고 자폭도 일삼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의 영화적 변형이라 보인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할복하는 걸로 나오는 일본군 총사령관 우시지마 중장은 실제로는 패잔병들을 모아 도망치기 바빴다. 이 역시 영화적 변형에 해당한다.
1945년 4월 1일부터 장장 81일간 지속된, 2차대전 중 일본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최초이자 가장 대규모 혈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는 영화 속 묘사처럼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의 진입 자체가 어려운 고지대의 험준한 요새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이 요새에서 그들은 북한처럼 땅굴을 파 그 안에서 힘겹게 절벽을 올라오는 미군을 상대로 효율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때문에 미군은 번번이 핵소 고지 점령에 실패하였으며 특히 일본의 자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사활을 걸고 나선 일본의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는 수류탄으로 자폭를 하거나 자폭기로 미군의 함대를 공격하는 등 영화 속에서도 사실적 수준으로 묘사된다.
일본군은 1944년 레이테 전투에서 이른바 자살 특공대라 불리는 '가미카제 특공대'를 활용하긴 했으나 그 규모가 작았고 오키나와 전투를 통해 대규모 '가미카제 특공대'를 운용했다.
네이버 참고문서_ 오키나와 전투
1945. 4.1~5.25일까지 무려 1500여기의 가미카제 자살특공기가 7번에 걸쳐 대규모 특공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끔찍한 사실은 이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의 구성원이다. 상대를 죽이기 위한 작전으로 자신 역시나 자폭을 하는 이 엽기적인 공격방법은 2차 세계대전때 일본 공군의 특공대들이 연합군의 큰 군함들을 향해 돌격하여 함께 폭사한데서 이들을 가리켜 '가미카제 특공대(가미카제 독고타이, 신풍 특공대)'라 한다. 이는 세계 전쟁 역사에도 전례가 없는 일로 특히 이 영화 속 묘사처럼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1942)에 일본은 미군의 상륙을 저항할 군비가 남아있지 않자 평균 연령이 20세 남짓한 자원병을 모집하여 자살 특공대를 꾸린다.
'천황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라는 명분 아래 어린 젊은이들을 500kg정도의 탄약이 실린 전투기에 몸을 실게 하면서 연료는 가고시마에서 오키나와까지밖에 주지않는 이들의 비인간적인 행태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돌아올 수 있는 연료가 없는 전투기에 탑승한 이들 자살 특공대는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미군들을 향해 돌진 또 돌진했다. 그야말로 같이 죽자는 끔찍한 슬로건이다.
<브레이브 하트>나 <아포칼립토> 등 이미 멜 깁슨 감독의 전작들에서 증명된 사실적인 묘사는 핵소 고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입증된다.
동료의 죽은 시체를 방패 삼아 앞으로 전진하기도 하고 죽은 시체더미를 자신의 몸 위에 덮고서 죽음을 위장하기도 하며 큰 부상을 입은 살아있는 동료를 살리기 위해 그를 산 채로 일시적으로 흙으로 파묻기도 하는 등 전쟁의 치열함과 참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똑똑히 목도하게 한다.
총탄과 수류탄이 쉴 새 없이 터지는 죽음의 한복판에서 총기 하나 손에 들지 않고 여윈 몸으로 수많은 부상병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한 도스의 간절한 기도와 사투는 전쟁 영화임에도 눈물겨울 지경이다.
우리 영화 <포화 속으로>나 <고지전> 속 전투는 헥소 고지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으로 보일 정도이다.
실제 데스몬드 도스(굉장히 마름 체격이었다)의 신체조건에 부합하기 위한 앤드류 가필드의 여윈 몸이 발휘해내는 초인적인 힘은 글로버 대위의 말처럼 기적에 가까워 보인다.
핵소 고지는 이미 알려진 바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1945년 5월 5일 오키나와 핵소 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6번의 전투에도 점령하지 못한 곳, 수많은 연대가 전멸하다시피한 전투에서 총을 들지 않은 채 자그만치 맨 손으로 75명의 부상자를 구한 데스몬드 도스는 그 공로로 미군 최고의 영예인 ‘명예의 훈장'을 받는다.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편집상, 음향상, 음향효과상에 이르기까지 총 6개 부문에 걸쳐 제 89회 아카데미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된 핵소 고지는 마지막 엔딩 크레딧 직전에 담긴 실제 인물인 데스몬드 도스와 핵소 고지 전투 당시 대위였던 캡틴 글로버(샘 워싱턴)의 실제 생존 인터뷰 영상이 수록되어 있어 또 한 번 뭉클함을 전한다. 게다 영화 속에서 도스가 한 눈에 반한 간호사 도리스(테레사 팔머)와의 실제 결혼담 및 생전까지 지속된 그녀와의 결혼생활과 그들의 실제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핵소 고지는 2차대전을 소재로한 수많은 전쟁 영화들 중에서도 그 결이 확실히 다르다. 전쟁에서 총을 들지 않고 싸운 인물의 실화담은 그 자체로 전쟁 영화에 이율배반적이며 이런 이율배반성이 핵소 고지를 다른 전쟁 영화들과 확실히 차별화시킨다. 전쟁을 싸우는 것이 아닌 구해내는 것, 죽이는 일이 아닌 살려내는 일에 초점을 맞춘 발상의 전환은 멜 깁슨 감독의 뛰어난 사실적 연출과 더불어 빛을 발한다.
자칫 영웅담과 기적의 신화로 흐를 뻔한 소재의 위험성을 전쟁씬의 사실적인 연출로 상쇄시킨다.
그리고 데스몬드 도스가 손을 내민 이가 단순히 아군만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전쟁에서 피해자는 나와 우리만이 아닌, 실상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모두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미군의 적군인 일본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자면 지극히 불편한 점이 없잖아 있겠지만 적어도 영웅을 좋아하는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사랑할 가능성은 충분해보인다.
<라라랜드>의 다미엔 차젤레 감독,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 <컨택트>의 드니 빌뇌브 감독 등 쟁쟁한 작품 및 감독들과 함께 이번 89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어 있는 멜 깁슨 감독,
1996년, 브레이브 하트로 이미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멜 깁슨이 이번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어떤 수상 결과를 보여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핵소고지#멜깁슨감독#앤드류가필드#테레사팔머#89회아카데미감독상작품상노미네이트작#2차세계대전#오키나와전투#가미카제자살특공대#우시지마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