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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Nov 19. 2022

직장 상사에서 인생의 멘토가 되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서두르면 축복이 없다)“


  아프리카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스와힐리어 속담이다. 모든 걸 빨리빨리 진행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여유를 갖고 움직이라는 의미이다.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들판에서 자연이 준 대자연의 선물을 보고 있으면 이 말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때로는 마음의 여유도 없이 한국에서 일만 해온 내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심히 직원들을 지켜보니, 그들 모두가 이 속담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듯했다. 오늘에 충실해야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걱정하면서 살 필요가 없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내가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오히려 주변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서두르면 축복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만 하는 나를 걱정해주면서 건네는 말이었다. 


  ’저라고 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지 않겠어요. 여긴 아프리카잖아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대답이었다.


  여유를 찾아 다시 방문한 아프리카에서 정작 나는 ’빨리빨리‘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사무소 직원들이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내가 조금 더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사무실은 ’체험 삶의 현장‘을 찍는 리허설 장소가 아니라, 정해진 기간 내에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실전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이라는 주어진 하루에 충실한 삶도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을 위해 일하면서도 동시에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일정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기에 미리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머릿속으로나마 희망찬 미래를 열심히 그려가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젠가 직원들이 알아서 척척 일할 때가 오면 그동안 즐기지 못한 여유를 마음껏 누리겠다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시골의 호텔에 모여 워크숍을 진행했다.

  ”오늘을 즐기되 내일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자!“

  우리 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말이었다. 그들은 내일을 그리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재만을 위해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원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그리기 위한 준비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더 나은 삶을 위한 여정을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못했다. 


  부임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다 같이 힘을 모아 국제포럼 행사를 하나 끝냈다. 어느덧 시계추가 2019년의 연말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연간, 월간, 주간 계획을 세우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연말에 가까워지면 연초에 세웠던 목표를 뒤돌아보고 새해 계획을 그리는 작업을 했다. 내게는 잔지바르에서 맞이하는 새해가 정말 특별했기에 마음가짐부터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올해 계획했던 개인 목표는 성공적으로 이루었니? 그리고 내년 계획은 생각하고 있는 거지?“

  습관처럼 해오던 인생 설계서를 만드는 작업이었기에 자연스레 직원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계획이요? 무슨 계획을 말하는 거예요?“ 

  인생 계획을 처음 들어본다는 듯 내게 반문했다. 내게는 작지만 아주 당연했던 습관이 의도치 않게 직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세우는 계획을 말하는 거야. 혹시 인생 계획 같은 걸 세워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

  내가 만난 대부분의 아프리카 친구들이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부에만 해당하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구체적인 목표까지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인생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직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 일종의 사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가족 중심의 가족 체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아프리카 사회에서 가족의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문화에서 개인의 삶을 우선시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문제였다.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 직원들은 가장으로서 자신들이 책임져야 하는 식솔이 많았다. 그만큼 그들에게 의지하는 가족 구성원이 많다는 걸 의미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의무였다. 심지어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하다 보니, 월급 일부를 떼어 저축할 여유조차 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직원들 또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가족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보여준 희생과 은혜에 보답하는 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아프리카에는 대체로 국가의 역할이 부재했다.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자리를 ’가족품앗이‘가 대신했다. 일정 수준의 복지서비스가 부족하다 보니, 그 빈자리를 주변 친척이나 가족들이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직접 책임지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많았다. 나 또한 그런 상황에서 한가로이 인생 계획을 세울 여력이 없었을 것이었다. 


  사무소에서 일하는 동안 직원들에게 직업에 필요한 기능과 지식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와 관련된 일을 전수해주는 데에만 내 역할을 한정 짓고 싶진 않았다. 직원들이 지금보다는 좀 더 계획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오지랖이 넓은 나의 장점을 활용하여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는 인생 경험을 직원들에게 전수해주고자 했다.


  ”이번 주말에 집안일로 바쁘겠지만 한 시간 정도 짬을 내주면 좋겠어. 그리고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인생 목표를 각자 5개만 작성해서 가지고 오도록 해.“

  상황과 분위기에 휩쓸려 살기보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게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자신만의 인생 목표나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했다. 나는 경험을 통해 목표 의식이 뚜렷하면 계획적이고 전략적으로 삶의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직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생 목표와 관련한 몇 가지 참고 자료를 공유해주었다. 과연 직원들이 인생 목표를 세워올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직원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나쁠 건 없었다.


  처음이라 서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신들이 새해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작성해서 가지고 왔다. 신문지 위의 여백에 인생 목표를 적어온 압둘라, 꼬깃꼬깃 구겨지고 닳아빠진 종이를 지갑에서 꺼내는 이브라힘, 공책을 뒤집은 채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버리기라도 한 듯 자꾸만 머리를 긁적이는 주마에 이르기까지 어찌 됐든 간에 모두가 자신만의 인생 목표를 적어왔다. 


  그들의 인생 목표는 ’결혼하기‘, ’집짓기‘, ’동생이랑 놀아주기‘, ’가족들 맛있는 음식 사주기‘, ’동생 학자금 지원하기‘까지 주로 가족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전 직원들이 생애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인생 계획을 작성해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주마! 새해에는 결혼도 하고 집도 짓고 싶다는 좋은 계획을 세웠구나. 그런데 결혼하고 집을 짓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생각해봤니?“ 

  주마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유난히 부끄럼을 잘 타는 주마가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인생 목표를 세워보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가져오기는 했다. 그렇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계획까지 깊게 고민해본 건 아니었다.

부끄럼을 잘 타던 주마는 어느덧 성장하여 방송사와 인터뷰까지 진행하기도 했다.

  ”네가 생각하는 집을 짓기 위해서는 총얼마의 돈이 필요하지? 네 월급은 얼마지? 매달 학자금 대출 갚고 식구들 도와주고 나면 얼마가 남지? 남은 금액에서 매달 얼마씩 저축을 해나갈 수 있지? 얼마 동안 저축해야 집을 지을 수 있는 돈이 만들어지니?“

  좀 더 현실적으로 인생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처음 해보는 인생 계획서 수립에 어색해했다. 나 또한 처음에는 익숙지 않은 일이라서 많이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중요한 건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인생 계획을 설계해보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우리 직원들에게도 그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인생의 목표를 하나씩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과 자신감이야말로 아프리카의 젊은 직원들에게 필요한 부분이었다. 직원들은 내가 그 나이 때에 갖지 못한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삶에 대한 열정과 그 열정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긍정적인 태도였다. 아프리카 젊은 친구들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긍정의 힘과 열정이 넘쳐났다. 나는 단지 열정의 방향이 자기가 원하는 인생의 목표를 위한 길로 향하게 해 주길 원했다. 내가 제시해준 방법이 그들을 정서적, 정신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너희들이 정한 목표 중에서 세 개만 우선순위로 정해봐. 그리고 연말까지 목표를 달성하도록 같이 노력하자. 목표를 달성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특별한 선물을 하나씩 해줄게.”

  직원들이 생애 처음으로 세운 인생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해줬다. 주어진 일상 업무를 수행해나가기도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래도 직원들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직원들이 너무나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런 직원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인생의 항로를 잃지 않도록 언제든지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주중에는 일하느라 바빠서 짬을 낼 여유가 없었다. 주말에 시간이 날 때마다 직원들과 번갈아가며 종종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런 시간을 활용하여 사무실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며 친목을 다졌다. 무엇보다도 인생 코칭도 해주고 근심 걱정도 챙길 겸 직원들과 편안한 자리를 이어나갔다.


  “제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어요. 하지만 그 방법을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한 번은 주마가 고민을 털어놨다. 주마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자신의 고민을 좀처럼 남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입을 통해 ’삶에 변화를 원한다‘는 말을 들으니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마야!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 처음 해보는 고민이라 서투른 건 당연해.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 틈나는 대로 독서도 하면서 네가 본받고 싶은 인물을 한번 찾아보렴.”

  그의 물음에 대답해주면서 나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이후에도 주마를 따로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며 그의 고민거리를 상담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책도 선물해주었다.


  “어제 은행에서 집짓기 프로젝트를 위해 통장을 하나 개설했어요.”

  주마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위해 적금을 들었다며 활짝 웃는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른 직원들의 기에 눌려 상대적으로 주눅이 들어 있던 주마한테서 약간의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되었다. 주말에는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다고 했다. 독서를 통해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알려왔다.

직원들의 성장 스토리는 나의 인생 스토리였다.

  그는 내가 인생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좀 더 계획적인 삶을 살다 보니,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감이 붙는 건 당연지사였다. 주마를 비롯해서 우리 직원들이 자신들의 인생 설계를 통해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삶의 방향성을 갖고 자신들의 삶에 자신감을 채워준 것에 대해. 내가 하는 말도 그냥 허투루 넘길 수 있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믿고 따라 주었다. 결국 그들 스스로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현듯 아프리카에 첫발을 내딛고 나서 아등바등 적응하려고 노력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인생의 힘든 여정에서 삶의 등불이 되어준 진정한 멘토를 만났더라면 새로운 인생길에서 이토록 헤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아쉬움이 있었기에 어느덧 40대가 되어 돌아간 아프리카에서 우리 직원들에게 따뜻한 등불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들은 남들이 지니지 못한 긍정적인 힘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자신들의 강력한 무기를 활용하여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직원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전환점을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들이 인생의 운전대를 직접 잡고 운전할 수 있도록 옆에 앉아 힘을 북돋아 주는 조력자에 불과했다. 조수석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때론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그들이 성장한 만큼 나 또한 성장해갔다. 그들의 ’성장 스토리‘가 나의 ’인생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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