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k Oct 23. 2020

피고 신입사원을 집행유예 3개월에 처한다! 땅땅땅!

경력사원도 집행유예 3개월!

집행유예. 유죄의 형을 선고하면서 이를 즉시 집행하지 않고 일정기간 그 형의 집행을 미루어 주는 것으로, 그 기간이 경과할 경우 형 선고의 효력을 상실하게 하여 형의 집행을 하지 않는 제도를 말한다.


직장 생활에도 집행유예가 있다. 실수를 해도 이를 즉시 질책하지 않고 일정기간 질책을 미루어 주는 것으로,  기간이 경과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경우 질책의 효력을 상실하게 하여 질책하지 않는 제도. 그렇다, 바로 수습 기간(Probation Period)이다.




내 수습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이다.


"마크, 다음 달에 출시 예정인 호떡믹스 신제품 보도자료 써봐요. 이전 기사들 참고하고요."


사수인 부장님이 신입사원인 나에게 처음으로 신제품 출시 보도자료를 써보라고 과제를 던져줬다. 글 쓰는 것이라면 또래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나는 실력 발휘를 하고 싶었다. 기존의 딱딱한 제품 기사에 변화를 줘서 재미있게 써볼 마음이었다. 시장 트렌드도 알아보고 타사 기사도 찾아보면서 열심히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부장님께 자신 있게 내밀었다.


결과는?

내 보도자료 종이는 너덜너덜 유혈이 낭자했다. 빨간 글씨가 없는 곳이 없었다. 단어, 문장, 표현, 길이, 문법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해부당했다.


"마크, 내 코멘트 참고해서 다시 써와요."


부장님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제야 깨달았다. 제품 출시 기사는 정해진 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서두에는 제품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과 함께 출시 내용을 알려야 했다. 이어서 제품의 특장점이 들어가야 하고, 다음으로는 시장 트렌드에 대한 내용과 함께 회사 관계자 코멘트가 들어간다. 마지막에는 판매처, 제품의 용량, 가격과 같은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덧붙여 틀은 따르되 빤하지 않아야 한다. 이후 몇 번의 퇴고와 피바람을 거쳐 보도자료가 완성됐고 부장님은 내가 작성한 최종안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하도록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수인 부장님은 내가 써 온 글을 가지고 '왜 이 정도밖에 못 써!'라고 크게 질책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다시 써오라는 것도 아니었고, 빨간 글씨로 깨알같이 피드백을 해줬다. 당시에는 그런 상황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뭐 대단한 문학 작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틀에 맞춰 보도자료를 쓰는 것인데도 너무 빡빡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부장님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부장님 뿐 아니라 팀 사람 모두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수습 기간. 회사에는 3개월의 수습 기간이 있었다. 수습 기간엔 월급도 80% 수준으로 나왔다. 정해진 건 3개월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6개월 또는 그보다 조금 길게 다른 직원들은 신입사원이 어지간한 실수를 해도 용납했다. '괜찮아, 수습 때는 다 그래'라는 식이었다. 나중에 수습이 풀렸다는 것을 느꼈을 땐 오히려 수습 기간이 그립기까지 했다.


수습 기간에 국한하지 않아도 첫 회사 입사 후 처음 몇 달간 많은 이들이 자괴감에 빠지는 일이 생긴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 회사와 잘 맞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괴롭힌다. 괴로운 상황이지만 이 힘든 시기를 '집행유예'라고 생각하고 슬기롭게 보내보면 어떨까. 본인이 독립적으로 업무를 가져가고 단독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문제는 수습 기간을 바라보는 회사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호주 지사의 직원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각 나라의 제도를 비교하다 수습 기간 얘기가 나왔다. 호주 친구 말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호주에선 수습 기간이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해.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해고할 수 있거든."


물론, 아무 이유 없이 해고하진 않을 것이다. 해고할 사유가 생겨도 수습 기간이 지나면 해고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데, 수습 기간에는 그것이 자유롭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스타트업에서는 수습 기간 생존율이 높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핀테크로 유명한 한 회사의 경우, 대부분 경력직 채용인데 3개월 수습 기간 후에 무려 30% 정도가 회사를 나간다고 한다. 회사 직원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는 신선했다. 3개월 동안 회사는 직원을 차례 정도 평가하고 3개월 후 최종 결과를 알려준다. 그런데 직원도 동시에 세 차례 회사를 평가한다고 했다. 내가 앞으로 계속 다녀도 되는 회사인지를 평가하고 개선할 부분이 있으면 요구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물론 스타트업이라 가능한 문화일 수도 있지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결국 직원이 바라보는 수습 기간에 대한 시각과 회사가 바라보는 그것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회사 입장에선 수습 기간을 위기관리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전 회사에서 한 영업직원이 본인을 환영하는 회식에서 좋지 않은 술버릇을 보여서 퇴사를 한 적이 있다. 회사 입장에선 힘들게 뽑은 포지션이어서 다시 뽑는 수고를 감당해야 했지만 함께 갈 수 없다는 판단을 했고 그걸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수습 기간이었기에 가능했다.


똑같은 수습 기간도 신입사원과 경력사원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적용된다. 신입사원에게 수습 기간이 '잘못해도 용서해주는 기간'이라면, 경력사원에게 수습기간은 '잘못하면 벌 받는 기간'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많은 회사들이 완전 신입보다는 약간의 경력이 있는 중고 신입이나 경력사원을 선호하고 있다. 무슨 뜻일까? 무엇을 해도 용서가 되는 집행유예가 아니라 잘못하면 바로 잡혀가는 집행유예를 원하는 것이다.

경력사원은 3개월 내에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수습 기간이라는 개념은 유지될 것이다. 특히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신입사원으로서 수습 기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주위에서는 이런 말들을 많이 할 것이다. '열심히 배워요' '언제든지 물어봐요' '틀려도 괜찮으니 해봐요' 회사에서는 겉치레로 하는 말들도 많지만 이런 말들은 속는 셈 치고 믿어보자. 열심히 배우고 언제든지 물어보고 틀려도 괜찮으니 해볼 수 있는 몇 달 안 되는 집행유예, 수습 기간을 마음껏 즐기면 좋겠다.  




신입사원들이 집행유예를 거쳐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것이 나와 같은 조금 지난 세대들이 도와줘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또한 경력사원들이 집행유예 동안에 회사와 서로 핏(fit)이 잘 맞는지 확인할 뿐 아니라 회사가 경력직에게 성과만 바라지 않고 실수, 도전, 질문도 용인해주는 문화도 안착되길 바라본다.

이전 04화 발표 자료 준비하는 게 어렵다고? 자, 따라 해 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