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뇌는 정해진 형상과 위치가 있지만, 알고리즘인 AI는 다양한 형상을 가질 수 있고 어디에나 위치할 수 있다. 이러한 AI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인 로봇에 입력되어 인간이 생활하는 현실세계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고, 인간은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동시에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AI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 갖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AI가 창의력을 가지면 인간성이 결여된 인간과 흡사해 지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AI의 창의력을 예고하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스카이’라는 AI가 등장하는 터미네이터(1984)와 ‘비키’라는 AI가 등장하는 아이 로봇(2004)이다.
두 영화는 논리적인 AI가 일상화될 것이라 예상되는 2030년 즈음을 배경으로 여전히 비논리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과 AI 간의 대립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영화 터미네이터의 AI인 스카이는 인간을 모든 위험의 근원이라 규정하고 핵무기를 사용해서 지구를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고 인류를 멸망시키는 선택을 한다. AI가 극단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단순히 직립보행을 하던 존재가 머리를 사용하는 존재에게 느낀 감정이 이런 두려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에 반해 아이 로봇에 등장하는 AI인 비키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해치거나 해가 되는 행동을 할 수 없는 원칙이 입력되어 있다. 그 결과 비키는 비논리적 행동을 하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구속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완벽하다고 말한다. 이 판단도 인간을 해칠 수 없는 AI의 극단적 선택에 해당한다. 영화의 결말은 주인공과 인간을 돕는 써니라는 이름을 가진 특별한 로봇의 활약에 힘입어 비키의 감금에서 해제되고 일상을 되찾는다. 써니는 인간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키의 “너의 (인간을 돕는) 논리를 이해 못하겠어”라는 질문에 써니는 “이해하지 마 (나는) 비논리적이야”라고 대답한다. 써니는 인간의 일정 부분을 닮은 AI가 입력된 로봇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도운 것이다.
AI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효율을 증진하는 일변도로 발전한다면, 영화 속의 장면은 현실에 등장할 수 있다. 두 영화는 인간의 감성적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AI를 양산했을 때 찾아올 미래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계를 작동시키는 AI는 논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비논리적인 것은 오작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두려운 사람들은 AI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주로 가정에서 사용하는 KT의 AI 스피커인 기가지니에게 가장 많이 한 채팅 키워드는 '사랑해' '안녕' '뭐해' '고마워' '미안해'라는 감성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AI의 일상화가 시작된 지금, 인간다운 알고리즘을 고민해야 하는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때다. 자신은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면서 타인의 비인간적인 삶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 삶이 알고리즘화 되어 AI에 입력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