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여주는 여자> 리뷰
산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어떻게 살 건가’에 대한 고민의 종착지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건가’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웰빙(Well-Being)을 넘어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임종 준비학교가 생기고 연명치료와 존엄사 문제 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화 사회, 이제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때다.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들의 다양한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중, 조력자살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소재로 주목을 받았다. 이 감독은 성을 사고파는 노인, 외로움에 잠식당한 독거노인의 문제를 그려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다. ‘박카스 할머니’, 소영은 노인들을 상대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탑골 공원 주위를 배회하다가 고객을 만나면 경찰들의 순찰을 피해 낡은 모텔을 전전한다. 하루 일당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지만, 우연히 보살피게 된 코피노 아이를 위해 햄버거를 사고 장난감을 산다.
어느 날, 평소 소영에게 잘해주던 송 노인이 뇌졸중을 앓고 있다는 소식에 소영은 병문안을 간다. 말끔하게 차려입기 좋아했던 노인은 요양병원으로 옮겨진 후, 대소변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사는 게 창피하다”라고 토로한다. 그는 병마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소영에게 송 노인의 간절함은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터이다. 결국 소영은 도움을 줄 수밖에 없었고, 노인은 간밤에 들이켰던 농약을 조금씩 토해내며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잠을 자게 된다.
의심할 법도 한데, 가족들은 죽음의 원인을 밝히지 않고 장례를 치른다. 과연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개인에게 있는지, 아니면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기에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꽃 배달을 하는 재우 할아버지는 초반에는 가장 생기 있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배달 바구니에 있는 꽃을 한 송이 뽑아 소영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친구처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눈다. 하지만 점점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자신도 기력이 쇠하면서 쓸쓸한 내색을 감추지 못한다. 아내의 기일을 지내며 더욱 외로워졌기 때문일까? 평소에도 결혼반지를 꼭 끼고 있던 그는 소영의 옆에서 수면제를 한 움큼을 삼켜버린다. 죽는 순간만큼은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한 여자의 생애가 이토록 처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영이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사실 소영의 본명은 ‘양미숙’이었고 젊은 시절 미군부대에서 살았다. 흑인 병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입양 보내야 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마음속 깊이 품을 수밖에 없었다. <씨네 21>의 인터뷰에서 배우 조여정(소영 역)은 “그런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할머니는 그런 환경에 처하고 싶었겠냐. 그들도 그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 않나”라고 반문하며 우울증에 걸릴 만큼 힘든 역할이었다고 한다. 이 감독은 소영처럼, 한국전쟁을 겪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고 개인의 삶이 전쟁으로 피폐화 돼버린 상황을 보여주고자 했다.
소영은 자살하지 않지만, 차가운 교도소 바닥에서 죄수복을 입고 사망하게 된다. 그녀의 죽음을 정의하는 마지막 단어, ‘무연고 사망자’를 남긴 채 엔딩 크레디트는 올라갔고, 관객들은 스크린 앞에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가난하거나 병들어서 혹은 외로워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노인들. 과연 그들의 죽음을 오롯이 개인의 자살이라고 한정 지을 수 있을까?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구조, 미비한 제도, 사람들의 무관심 탓이 크다면, 혹여 사회적 타살은 아니었을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