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광우 Nov 24. 2023

누구나 외치는 공정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

 유난히 정쟁이 심한 계절이다. 아마도 지역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채 6개월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어서일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자신을 선택해주면 마치 국민을 하늘 떠받들 듯이 하겠다며 온갖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그 말은 선거가 끝나는 순간 그들이 이전처럼 그 모든 약속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며 국민들 위에서 군림하려들 것이라는 예고편에 다름 아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거리의 플래카드와 신문의 정치면, 그리고 시사와 관련된 방송을 내가 애써 외면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인체기관이라는 놈은 내 명령에 항명하는 경우가 잦아 어쩔 수 없이 시답잖은 그들의 주장과 맞닥뜨리게 만들곤 한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건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이 ‘공정’이라는 단어를 떠벌인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불공정이 그들의 말과 행동거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건만 참으로 뻔뻔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외쳐대는 공정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달나라에서 온 까닭일 것이다. 

 문득 국내 한 회사의 튀르키예 현지법인에서 근무했을 때가 떠오른다. 당시 난 그 법인의 책임자로서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는 현지인들과 임금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현장직원들이야 크게 나로서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해마다 임금인상률을 정하는 근로자 대표와의 협상이 마냥 수월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게 끝나면 나머지 변수인 고과라는 건 현장책임자의 권한이어서 설득 또한 그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무직인 현지인 간부들과의 협상이었다. 그들과는 한 명 한 명 일일이 연봉협상이라는 직접 대면절차를 거쳐야했으며, 내가 매긴 고과점수를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협상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지독하게 이기적인 동물이라 누구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후한 법이어서 제3자가 내린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나의 평가결과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도움을 준 건 개인별 업적을 수치화해놓은 자료였다. 사람이 하는 일을 어찌 정확하게 계량화할 수 있을까마는 좌우간에 숫자는 그들에게 꽤 어필했다. 단지 기준을 수치화한 것에 불과한 그 일이 주관적 평가에 객관성이라는 가면을 씌운 셈이었다. 덕분에 난 어렵사리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며칠 뒤였다. 생산부서를 맡고 있던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입에 거품을 물면서 고함치듯 대들었다. 결코 공정하지 않은 협상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공정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단숨에 품질부서장이 그처럼 인상률이 높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그를 시작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하나같이 비교대상을 지목하며 상대의 인상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기보다 인상률이 높지 않아도 그의 업적에 비해 과도한 인상이라며 배 아파했다. 내가 자신을 향해 내린 평가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 내린 평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공정이었다. 잣대가 객관적이지 않고 오로지 남이 잘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진 공정. 흔히 우리가 말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이런 의미일까?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그것과는 분명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왜냐 하면 이들은 자신이 상대에 비해 더 누릴 수 있어도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협상이 시작되었다. 해결방법이 묘연했던 나는 제일 처음 나를 찾아왔던 친구에게 이런 제안을 해보았다. 지목한 친구의 급여인상폭이 불만이라면 그 친구의 인상률을 낮추는 대신 거기에 맞게 본인의 인상률로 낮추면 어떠냐고. 그 친구 또한 그의 급여인상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의아스럽게도 그는 그 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답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었다. 아니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는가. 결국 나는 모두에게 똑같이 최저인상률을 적용하겠다고 공표했다. 물론 그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탄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불만을 제기하며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그 여세에 힘입어 협상은 종지부를 찍었다. 불만들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잦아들었다. 자신들이 내뱉은 말을 차마 주워 담을 수 없어 마지못해 따르는 사람들도 보여 못내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 일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공정이 정작 공정하지 않다는 걸 깨우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냥 지켜만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불현듯 요사이 위정자들이 외치는 공정이 이들의 공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공정이야말로 그 기준이 자신의 관점에만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공정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차별이다. 공정과 차별을 논할 때면 어김없이 역차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공정은 객관성을 가질 때 그 가치가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내가 공정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리고 제3자가 공정하다고 느껴야하는 것이다. 

 인간사회 자체는 제각각 많은 이해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공정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나에게 불리한 것이야말로 공정이라고. 우리가 차별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바로 공정이라고. 모두가 이기심을 버릴 때 공정사회가 앞당겨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햄릿형 인간의 결코 쉽지 않은 선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