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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Nov 29. 2023

냉전에서 해빙까지

 칼로 물 베기라는 부부싸움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이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조차 이제는 이력이 붙어 크게 번지지도 않았다. 적당히 불이 붙을 만하면 둘 모두 그 자리를 피하는 지혜 아닌 지혜를 발휘한 탓이었다. 물을 벤 자리가 아무런 표시 없이 제 모습을 찾는 것처럼 우리들의 전장은 이전의 고요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 불과했다. 불씨가 사라지지 않은 불에서 화기가 당장 사라질 리 만무했다. 화기는 고스란히 내 몸속으로 옮겨왔다. 나의 오장육부는 한동안 그 불에 사정없이 타들어갔다. 더 이상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서 불이 사위어 겨우 내 감정을 추스를 수 있을 때가 되자, 몇 십 년을 함께 부부로 살아오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재가 되어 남아있었다. 

 그때부터 다툼의 귀책사유가 누구에게 있는지 따져보았다. 인간이란 원래 자기합리화에 아주 뛰어난 자질을 갖춘 동물이어서 결과는 보나마나 뻔했다. 백번 양보해 쌍방이 피해와 가해를 동시에 주고받았다 하더라도 가해의 비율이 높은 쪽은 분명 아내였다. 이런 다툼이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들을 소환했다. 기억은 대부분 훼손되어있었다. 다툼의 현장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서둘러 봉합한 흉터만 남은 채였다. 그조차 하나같이 내 쪽에서 양보하며 바느질한 서툰 솜씨였다. 판단의 주체가 바뀌지 않았으니 나의 피해의식에 변화가 생길 까닭이 없었다. 

 숙고 끝에 양보가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근본적으로 문제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떡하든 불화의 기간을 줄이려 내가 한 발 물러선 것이 화근이었다. 무슨 병이든 완치하지 않으면 언제든 재발하는 법이다. 이번을 계기로 더는 부부싸움이라는 걸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턱대고 내가 양보하며 무마할 것이 아니라 아내로 하여금 잘못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이루어지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토론의 장을 열 수는 없었다. 몇 차례 시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그건 실패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다툼이 있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아마도 잘잘못의 주체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아내를 가해자로 몰아가려는 데만 초점이 맞춰진 성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연히 논점은 흐려졌고 수시로 궤도를 이탈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무리수가 동원되었다. 별건의 사실들이 불거져 나왔고 사태는 기름을 부은 양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아내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방법뿐이었다. 아내 역시 지금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부싸움을 복기할 것이 뻔했다. 그 말은 그녀가 나와 별 다르지 않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인만큼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식할 거라는 뜻이었다. 난 기다리기로 했다. 잘못의 인지가 자존심의 벽을 허물고 사과라는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주어져야하지 않겠는가. 대신 그때까지 화해의 몸짓을 거부함으로써 아내를 계속 우리가 싸우던 그 공간에 머물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머잖아 아내가 나의 기대에 부응하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마주칠 때면 대화 한마디 없었고 그저 냉랭한 공기만 분위기를 감싸고돌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따금씩 아내가 혼자 있을 때를 훔쳐보자면 도무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내는 나와 부딪힐 때를 제외하고는 아주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숫제 다투었던 그 일에 대해서는 잊어 먹은 듯했다. 반면 나의 불편은 점점 가중되어갔다. 아내의 손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일들은 도처에 널려있었다. 세끼 식사도 빨래도 심지어 내 소지품 중 무언가를 찾으려 할 때도.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있었다.  

 다 늙어가는 마당에 냉전이 계속된다면 부부관계에 이로울 게 없었다. 아내가 먼저 사과를 한다고 해서 앞으로 부부싸움이 근절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손길을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그냥 숙이고 들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름 출구전략으로 내세운 건 서로 과실을 인정하며 반성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이건 내 잘못인 것 같아. 하지만 당신의 이런 언행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어. 앞으론 서로가 상대를 좀 더 배려했으면 해. 그렇게 말머리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서둘러 부부싸움을 했던 그날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 일마저 녹록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심해진 망각 증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때의 상황은 자욱한 안개 속에 가려있었다. 싸움의 원인이라는 것도 명확하게 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저 그때 느꼈던 아픔과 서운함만이 크기를 키운 채 아련하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며칠간 냉전을 불사할 정도라 여겼던 명분은 이미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뒤였다. 그만큼 시답잖은 일에서 출발한 싸움이었다. 무색해진 출구전략 앞에서 난 망연자실했다.   

 그때서야 부부싸움은, 원인을 근절시켜 완벽하게 해결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화해의 시기를 한시라도 앞당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처를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덧나듯이 부부싸움으로 입은 상처 또한 헤집으면 헤집을수록 아픔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괜히 원인을 궁극적으로 찾겠다며 상처를 들쑤시면 바이러스는 증식되고 전이될 뿐이다. 아울러 원인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어찌어찌 치료를 했다한들 영원히 흉터가 남는 잘못을 범하기 십상이다. 상처에는 원인과 상관없이 일단 소독부터 서둘러야 한다. 그걸 방치하는 순간 완전한 복원의 기회는 날아가 버린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아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골라 봉지에 담았다. 예전과 같이 그저 없었던 일처럼 모른 척 맥주를 한 잔 가득 따라 아내의 손에 쥐어주며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되리라 철석같이 믿으면서. 편의점을 나서자 물을 베기 위해 야심차게 휘둘렀던 내 칼날에는 물방울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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