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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Jan 15. 2024

달리기, 인생의 축소판

 단조로운 일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은퇴를 하면서 그 깊이는 더욱 심화되었다. 아침 달리기, 오전의 독서, 오후엔 동네 카페에 앉아 노트북과 씨름, 그러다 어스름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TV 채널 싸움. 반복되는 생활은 지루함을 가져다주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가끔씩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쓸데없이 방의 레이아웃을 바꿔보기도 하고 무턱대고 근교의 산을 오르는가 하면 아내의 꽁무니를 쫓아 전통시장을 누비기도 한다. 그래봤자 새로운 느낌은 잠시뿐 근본적으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이런 지루함을 이겨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숱한 변화의 시도 가운데서 유독 바꾸려하지 않는 일이 있다. 매일같이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 일이다. 이십 년 동안 그건 내 생활에서 바뀐 적이 없다. 다른 운동으로 대체하려 생각해본 적도 없고 무단히 거른 적도 없다. 물론 몸을 놀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거나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 빠뜨린 경우가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부족한 내가 건강에서마저 뒤쳐진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위기의식의 발로에서 생겨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가끔씩 인생을 달리기에 견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달리는 고통을 잊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려 할 때 그 버릇은 곧잘 발동된다. 그럴 때마다 달리는 거리는 인생의 길이로 대체되곤 한다. 하루에 내가 달리는 거리는 평균 10킬로미터 정도다. 그 중에서 6킬로미터를 넘어서는 순간은 유달리 내가 몸 상태에 집중하는 구간이다. 내 나이가 육십을 넘었으니 10킬로미터를 인생백세로 환산한다면 전체 인생 가운데 현재 내가 처한 지점이 그 부분이 아닐까 여기는 탓이다.  

 장거리를 달리다보면 견디기 벅찰 정도로 힘든 시기가 있는데 이 지점을 지나면 호흡이 안정되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일종의 쾌락이 찾아온다. 마라토너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러너스하이가 바로 그 구간이다. 공교롭게도 나의 경우 그건 앞서 말한 6킬로미터를 좀 지난 지점에서 자주 찾아온다. 그렇다면 달리기코스와 내 인생 구간을 비교하는 작업은 더더욱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지금 나의 위치야말로 살아온 날들 가운데 러너스하이라 일컬은들 조금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여태 열심히 살아온 덕분에 특별히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여행과 같은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을 즐기며 나름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후의 구간이다. 7,8킬로미터를 지나면서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다. 힘든 순간으로부터 어서 빨리 벗어나 편한 상태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때면 내 나이 칠팔십으로 접어들 때도 삶 자체가 힘들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을까 의문이 생기곤 한다.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고통이어서 거기서 탈출하고 싶다면 그건 죽음을 의미할 텐데 과연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질까? 당연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달리기가 끝이 난 후에는 나의 다른 생활이 이어질 거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그 어떤 믿음도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지금보다 한결 익숙해지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두려움 또한 상당부분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찾아올 때마다 직접 맞닥뜨리지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피하기 급급한 내가 그때는 좀 의연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확실한 게 아니라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죽음은 그만큼 두려운 대상이라는 걸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7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 달리는 것 자체를 즐겨보자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주변에서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살펴보며 계절을 느끼기도 하고, 행인들을 쳐다보며 그들과 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해 생각해보고, 나의 건강과 체력지수가 이 달리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음을 체감하다보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그건 쉽지가 않다. 가쁜 호흡과 신체적 고통은 오로지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 순간만을 학수고대하게 만들 뿐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건 오직 완주 이후에 찾아올 심신의 평화에 대한 확실한 믿음 덕분이다. 

 시간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흐르기 마련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죽음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돌이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또 한 번 인생을 달리기에 빗대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음’이 기다린다는 믿음이 나를 목적지까지 포기하지 않게 달릴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사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한다면 내 삶의 자세는 바뀌지 않을까? 굳이 종교적 믿음이 아니어도 좋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지극히 진부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공포는 쉬 극복되고 난 보다 밝은 표정으로 당면한 현재를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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