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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Feb 11. 2024

할머니의 독서와 할아버지의 필사

 카페에 앉아 한참 시간을 보낼 무렵이었다. 출입구의 문이 열리면서 노부부 한 쌍이 들어섰다. 팔십대는 너끈해 보이는 게 못 보던 얼굴이었다. 동네카페여서 대부분의 고객이 단골들인데다 난 이미 그곳의 터줏대감을 자처하고 있었기에 웬만하면 눈에 익은 사람일 텐데 그들은 달랐다. 호기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사이 두 사람은 빈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내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곧 무엇을 마실 것인가를 두고 두런두런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문을 키오스크로 하는 매장이라 은근히 걱정이 된 나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나이라면 기기사용에 익숙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원하는 음료를 확인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자리에 앉혀둔 채 일어나 거침없이 키오스크 앞으로 가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음료의 주문을 마쳤다. 손놀림이며 소요된 시간으로 미루어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솜씨였다. 관심은 기하급수적으로 덩치를 키우며 제 체급을 올렸다.  

 잠시 후 음료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무료해진 나머지 소일거리를 찾는 게 분명했다. 곁눈질을 이용한 나의 훔쳐보기는 계속되었다. 가방에서 빠져나온 그들의 손에는 책이 한 권씩 들려있었다. 두 권 모두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작가의 소설집이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지만 이어진 할아버지의 행동은 나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더더욱 충분했다. 추가로 노트까지 꺼내 든 다음 별 일 아니란 듯이 책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한 것이다. 펼쳐진 책의 페이지와 이미 많은 내용이 기록된 노트는 필사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때서야 어렴풋이 7~8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실직을 막 당해 좌절감을 극복하려 도서관을 출입하며 나름 와신상담의 의지를 다질 때였다. 그곳에서 난 나만큼이나 매일같이 도서관을 출퇴근하다시피 하는 어르신을 한 명 만났다. 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은 독서와 필사가 전부였다. 필사를 한다는 게 보통 사람이 아니다 싶어 주의 깊게 살피곤 했었는데 그때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옆자리의 할아버지였다. 할머니 역시 당시 할아버지가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할 때면 그 곁을 지키곤 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세월은 결코 그냥 흐르는 법이 없어서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이 늘어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환한 미소를 간직한 상태였고 말을 하는 품이며 행동거지에 교양이 충만한 게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도 자분자분하니 품위가 그대로 묻어났다. 건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까닭모를 반가움이 확 밀려들었다. 

 흔히들 늙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신체적인 운동, 정신적인 사고, 사회적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할아버지야말로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 아닐까? 동네주변을 걸어 다니면서 도서관과 카페를 찾고, 끊임없이 독서와 필사를 하며, 할머니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부러움을 넘어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달리기를 하고, 독서와 글쓰기를 빠뜨리지 않으며, 친구나 아내와 화목하게 지내기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손님들이 몰려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빈자리를 찾지 못해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주섬주섬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내 조그만 테이블 두 개가 맞닿아있던 그들의 좌석 중에서 하나의 테이블이 깨끗이 비워졌다. 부창부수라더니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의도를 금세 파악하고 치워진 테이블과 의자를 한쪽 옆으로 밀어냈다. 순식간에 2인용 좌석이 새로 마련되었다. 매장 내에서 서성이던 두 사람이 그걸 발견하고는 자리를 차지하며 그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돌아갈 때가 되었던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지품을 챙겨든 그들은 앉았던 의자를 다소곳이 테이블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사용했던 컵을 할아버지가 퇴식구로 반납하는 동안 할머니는 물티슈를 꺼내 테이블 위를 말끔히 닦았다. 좌석은 그들이 처음 점했을 때보다 한결 윤기가 반들거렸다. 반짝임은 고스란히 조용히 카페를 빠져나가는 그들의 등 뒤로 옮겨갔다. 난 그들과의 작별이 왠지 아쉬워 떠나간 자리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는 글귀만 테이블 위에서 네온사인처럼 깜빡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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