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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호텔 CMO가 되었나?

LMNT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호텔 CMO가 된 과정

한 통의 편지


모든 이야기는 2019년 한 통의 메일에서 시작된다. 그 메일을 놓쳤거나, 답장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결국 프로젝트 의뢰에 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결과는 없을 것이다.



아직,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보실 분은 테이크호텔 공식 유튜브 계정 '테이크잇이지'에 업로드된 짧은 영상을 참고하시라.

https://youtu.be/imM9Hn6DkGg

테이크호텔에 합류하게 된 이야기. 나의 관심사. 호텔 세일즈 방안 등에 대해 이야기나눴다.

아래는 바로 그 한 통의 메일이다.


2019년 3월 18일, LMNT 웹페이지를 통해 메일을 보내신 당시 이루다 선임님. 지금은 테이크호텔의 무려 대표가 되셨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메일을 보낸 이루다 선임은 복잡한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핵심을 짚어낼 줄 알았고, 타인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능력있는 직원이었다. 경청은 그저 귀를 열고 듣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발언이 어떤 맥락에 위치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파악하며 해석하며, 온갖 이야기를 수용하여 새로운 지식으로 버무릴 줄 아는 고도의 역량이다. 그런 역량과 성실성, 열정, 통찰 등이 인정받아 이 분은 수많은 윗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의 대표이사로 파격승진하게 됐다.


첫 미팅


광명KTX역 앞에 COEX 규모의 단지가 들어선다, 오피스들이 들어오고, 백화점과 SBS A&T가 들어서 미디어 교육 및 액티비티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 옆에 27층 규모의 4성급 호텔이 들어서는데, 이 호텔의 브랜딩을 맡기고 싶은데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겠냐는 연락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마음으로 미팅에 응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W호텔을 만든 가이아(GAIA)가 디자인을 진행했고, KAIST의 모 교수팀에서 브랜딩을 진행했다. 하지만 해당 결과물들은 너무 올드하거나, 핵심 타겟의 고객 경험 향상을 위한 기획이라기보다는 제품 디자인에 지나치게 포커스돼 있는 기획에 가까웠다는 평이 이어졌다. 그런데다가 Feasibility 검토상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강해 결국 Drop. 이후 컨셉이 다소 변경되면서 이미지와 브랜드 경험 설계의 변경이 필요하게 됐는데, 기존 이해관계자들의 생각과 행동이 유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함께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미 몇 년이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새롭게 무언가를 정의할 상황이 되지 못해 프로젝트 참여를 매우 망설였다. 그래서 프로젝트 불참 의사를 밝혔다. 이후 그 담당 직원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2차 설득이었다. 또 다시 어렵사리 고사했다. 이미 수많은 과정을 통해 진척이 되어 있어 새로운 판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상황적 조건이 마련되지 못할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3번째 연락이 왔다. 운영을 책임지고 담당하는 사장님이 보고 싶어한다는 말씀과 함께. '네트워킹 차원에서 인사만 드리고 오자'며 미팅에 응했다.


블루원 윤재연 CEO님과의 만남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1시간 가량 CEO님의 설명을 경청했다. CEO님의 철학과 태도, 혁신적인 생각을 들으며 ‘멋지다’고 생각했다. ‘룩스타워(LuxTower)’라는 다른 사업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빛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으시라” 말씀드리고 대화를 마무리했다(빛과 사과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3장의 신화적 미장센을 구성하는 고전적 메타포다.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멋진 분과 일을 같이 하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일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초기부터 우리의 페이스를 만들어 진행할 환경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럴 경우 프로젝트를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까.


그런데 CEO님이 일어나시면서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시는 게 아닌가. 실무진은 당황했고, 프로젝트를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호텔의 철학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브랜드 경험 디자인에 대한 오해


내가 브랜드업에 발을 들여놓고 3-4년 가량이 흘렀을 때(대략 2009년~2010년), 그 때는 이미 브랜드에 대한 철학이나 전략적인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꼰대 취급을 받았다. 모든 업계가 반복되는 사이클이 있는데, 그 때는 디자이너 중심의 브랜딩이 꿈틀이며 전개되기 시작할 때였다.


브랜드의 철학, 가치 따위의 추상적인 '본질'로부터 표면의 브랜드 시그널(네임, 디자인, 스토리, 태그라인, 웹사이트, 필름 등의 브랜드 엘레멘트)로 발현되어가는 다분히 관념론적인 아이덴티티 모형을 진지하게 이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던 가운데, 이미 1997년 <The Experience Economy>를 통해 등장해 세계를 강타한 하나의 키워드, 바로 '경험'이라는 개념이 국내외 디자인 씬에서부터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개념이 기존 아커식의 아이덴티티 모형과 충돌되는 것은 아님에도, 유행에 민감한 국내 시장의 속성을 반영이라도 한듯, '경험'디자인이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사실 디자이너 베이스로 이 부분이 강조되다 보니, 시각적으로는 화려했고, 그간 잘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각적 일관성과 우수한 적용성 등에 금세 매료됐다.


이때부터 국내에서는 본격적으로 사용된 개념이 있으니, 바로 '브랜드 경험 디자인'이다. 통상 업계에서는 BX Design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디자인 회사에서는 편의상 'BX파트'라고 하며 '시각디자인 파트'를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브랜드 경험 디자인은, 본래 '브랜드화된(브랜드가 매개가 되는) 고객 경험 디자인'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Branded Customer eXperience Design'.

나는 이 개념을 내 식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학적 엄밀성, 지적 정교함, 오컴의 면도날.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무언가를 읽을 때 알러지 반응이 오시는 분들은, 바로 다음 단락으로 SKIP하시길 권유한다.


브랜드 경험 디자인(Branded Customer eXperience Design)이란?

브랜드의 정신과 가치 등을 느낄 수 있도록, 브랜드 연상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방향으로, 내외부 고객과 비즈니스가 만나는 다양한 접점을 디자인하여 고객 경험의 질을 높이고, 나아가 비즈니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일련의 브랜드 경영 프로세스


보다 간결하면서 훌륭한 정의는 많은 학자들께서 도움을 주실 거라 생각한다. 요는 브랜드 경험 디자인이 시각 디자인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는 것이고, 오히려 시각물은 굉장히 일부분만을 커버한다는 거다.


초기 테이크호텔 프로젝트를 맡을 땐, 철학, 네임, 시각 디자인 등만을 작업하고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동료들 급여를 주고, 연봉협상에 미리 대비하려면, 다른 ROI를 높일 프로젝트를 또 구해야했으니까. 하지만, 프로젝트에 착수하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긴밀하게. 보다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객의 동선과 경험의 양상을 보다 색다르게 만들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이해관계자들과 보다 긴밀하게 지내야 한다!'


그래서 동료들과 제대로 된 '브랜드 경험 디자인'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착수했던 시기에는 다른 모든 프로젝트를 거절하고, 이 프로젝트에만 집중했다. 전직원 모두가 이 프로젝트만. ROI가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그만큼 집중력이 높았다. 그리고 호텔업에 이해도가 떨어지는 우리로서는 학생처럼 그들의 랭귀지를 빨리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매주 미팅을 요청했고, 이해관계자 대다수를 참여시켜달라 요청했다. 일반 건설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지닌 CEO와 그 혁신을 반대하는 조직 내에서 적극적으로 혁신을 수용하며, CEO의 가치 방향성과 멋진 싱크를 이루는 프로젝트 담당자가 있어, 프로젝트는 빠른 속도를 내며 진척되었다. 그리고 TFT의 전폭적인 지원, 리더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 생각의 존중 등이 있지 않았다면 그런 속도를 내기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자세한 중간 과정은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철학, 고객 조사에 대한 것, 고객 경험 프로그램, 웹사이트 디자인, 새로운 웹 개발의 고충, 이해관계자들의 변명과 책임 떠넘기기,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이해관계자와 일할 때의 기분, 일처리 방식 등 모두 정리하면 책 한권은 족히 넘을 것 같다.)


테이크호텔에서 나의 역할


그렇게 햇수로 3년이 흘렀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테이크호텔의 CMO를 겸직하게 되었다. 이 과정 역시 여러 과정이 있었는데, 결국 생각의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 자리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이미 다른 CMO가 있었는데, 전반적인 결이 맞지 않고, 호텔을 기존의 호텔로 다시 되돌리려는 시도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초기 만들어놓은 철학은 온데간데 없어진 듯, 운영효율성과 무자비하고 불투명한 가버넌스만 남겨졌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잠시 외부에서 바라보던 그 시기, '테이크 다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테이크다운 고객 경험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정말 여러 사람의 지혜가 모여 잘 구성된 브랜드의 모든 형식과 내용이 한 순간에 망가지겠구나 생각했다. 속물적으로는, '이러다 포트폴리오로도 못쓰겠는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그러던 과정에 CMO는 물러났고, CEO님은 굉장히 혁신적인 조직 구성을 제안하셨다. '이루다 CEO', '최장순 CMO'. 나는 크리에이티브 그룹을 맡으며 기존 호텔리어들의 관성을 다르게 교육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일을 포함해 이곳의 마케팅, 브랜딩,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을 주문받았다.


...

잘 할 수 있을까..


그때도 고민이었고, 지금도 고민이다. 하지만, 고민은 언제나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그래서 늘 무언가를 하고 있다. 내 네트워크를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이 일에 많은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 자기 실력만 있으면 뭐든 된다고 믿어왔는데, 이 일을 하면서 자기 실력만 믿고 가면 안된다는 걸 알았다. 주변의 힘이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을 기획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사이좋게 무조건 좋기만 해도 안된다는 것도, 몸으로 느꼈다.  


테이크호텔은 '자기성장 플랫폼'


테이크호텔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자기성장플랫폼'이다. 더 상세히 표현하자면,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창조해나가려는 모든 자(크리에이터)들의 성장을 돕고, 지원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자기 커리어 비전을 강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클래스, 네트워킹, Job Chance까지 연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린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 컷을 그리 중시하진 않는다. 그보다 우린 인스타그래머블한 라이프씬(Instagrammable Life Scene)을 더 중시한다.  


객실은 그냥 덤이다. 호캉스니, 먹캉스니, 웍캉스니 하는 것들은 잠깐잠깐의 이벤트일 수는 있으나, 우리에겐 본질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 객실은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다. 대접받으려는 자들의 고전적인 욕망이 호텔 객실에 꿈틀이고 있으니까. 우리는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고객에게 미안할 수도 있지만) 자기의 것을 알아서 해낼 수 있는 능동적인 멋진 고객을 원한다. 우리 호텔 로비에는 '프론트 데스크'가 없다. 모두가 알아서 셀프 체크인을 해야 한다. 엘레베이터도 자기 모바일로 제어해서 사용해야 한다. 객실문도 모바일로 열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래된 관습을 지닌 고객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지금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MX팀과 CX팀 동료들이 잘 해나갈 것이다. 우리 호텔에서는 호텔리어가 단지 허드렛일이나 하는 'Servant'로 전락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남들과 다르게 가야한다는 강박이 있으면, 처음부터 무탈하게 안착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단지 컨설팅씬에서 전략을 수립하고, 조언을 줄 때는 논리도, 결론도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러 의견이 다 맞는 것 같고, 여러 결론이 다 실현가능한 것 같다. 처음부터 여러 욕을 먹으며 시작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 진행 양상과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와 우리 동료들은 그 모든 시련과 결과를 수용하고,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다.


적어도 지금 모여 있는 동료들은 달콤한 조건만을 찾아 떠나는 체리피커가 아닐거라 믿는다. 아닌가? 장교훈련을 받던 시절, 화생방 가스실에서 군가 두 곡을 4절까지 부르고 나온 적이 있다. 가장 받기 싫은 훈련이었다. 눈물 콧물이 얼굴에 매달려 있고, 콧물은 점성이 극대화되어 주성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양상으로 길게 땅바닥을 향해 늘어진 채 코에 달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가스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버텼다. 유리조각이 폐에 하나씩 박히는 느낌으로 숨을 쉬면서도, 내 옆에 동기가 손을 잡고 버티고 있으니까, 나도 버틸 수 있었다. 테이크 호텔이 처음부터 순탄하게 갈거란 생각은 당초 하지도 않았다. 벌써부터 아트웍과 관련해 내부에 갈등이 번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건 극복될 것이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합리성과 고객 경험의 논리로를 기준으로. 그런 합리적인 소통의 조직을 만들고, 안정감 있게 고객의 경험을 디자인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여기서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저희는 임원도 모두 실무자입니다. 세일즈, 콜라보, 공익활동 등 협업 문의, 제가 직접 받습니다. 

 편하게 연락주시길.

**협업 문의 : alive@take-hotel.com(최장순 C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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