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자의 인생 P(현재) 막 일상다반사
길을 잃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함에 길 잃은 아이처럼 가슴으로 울고 있다. 사람들을 붙잡고 하소연하고 도와달라고 울부짖고 싶기까지 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회사에서 권고사직 아니 하루아침에 잘리고 나서 우선 건강을 챙겨보기로 마음먹었다.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루틴대로 운동을 했다. 생활습관이 점점 변해갔고 지금은 건강하게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하루하루 생활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딴 게 아니라 일을 할 때 몸이 힘들어서였다. 지금은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했는데 여전히 일이 없다. 요즘은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다. 건강만 신경 쓰지 말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던지 공부를 해보던지 새로운 기술이라도 익히던지 했어야 하는데 정말 약지 못한 난 한 가지만 했다.
간간히 면접을 보긴 했지만 5년 전의 연봉을 제시한다거나 그것마저도 정말 나의 커리어를 묵살하듯이 내가 어떤 일을 어떤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일했는지 따위 관심도 없이 연봉을 깎기 위해 내가 살아온 세월을 부정당할 때면 정말 욕이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다.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하는 게 맞고 나 역시 크게 욕심 없이 내가 망친 내 인생이니 감수하고 감내하고 적은 월급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정말 끔찍하게 싫다. 아니 현실이 아닌 내가 싫다.
나이가 40이 넘고 5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모아둔 돈은 고사하고 빚에 허덕이고 남편, 자식은 물론 집도, 차도 아무것도 없다. 이젠 회사까지 없다. 무직에 백수다.
한 달에 나가야 하는 돈은 산더미고 일할곳은 없고 또 예전처럼 회사 구해질 때까지 일용직을 구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죽기만큼 싫다.
한때는 디자인이고 뭐고 다 싫어서 아니 사실 사람이 싫어서 일용직으로 몇 개월 살았던 적이 있었다. 처음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혼자 다니니 좋았다. 일로써 스트레스도 없고 퇴근하면 적어도 일스트레스를 집으로 가져오지 않아도 돼서 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고 일용직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었고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회사생활과 점점 비슷해지는 시기가 왔다. 결국 난 다시 예전 일로 돌아갔다. 내 천성은 일용직을 하던 내일을 하던 남의 일을 하던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노동력과 노력에 정당한 대가를 받는 일을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내 맘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금 느꼈다. 코로나가 터지고 남자 친구는 병을 얻고 퇴사를 하고 나 역시 경영악화로 잘리게 되고 고향집에 일이 생겨 나가야 하는 돈은 더 늘어났다. 그런데 난 지금 백수다. 대출은 고사하고 카드발급도 안 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30만 원짜리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하거나 일용직을 하거나 하는 일이었다. 절망이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인생을 컨설팅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묻고 싶다. 내가 지금 뭘 해야 하는 건지. 그냥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돈 벌고 살면 그걸로 되는 건지. 대체 뭘 배우고 뭘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지.
난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패션디자이너로써 사는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패션 쪽은 계속 나를 거부했다. 처음엔 학벌 때문에 그랬다.(20년도 전의 일이다) 그래서 대학도 다시 들어갔다. 미치게 공부했고 치열하게 살았다. 그랬더니 유학을 다녀오지 않는 게 발목을 잡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눈높이를 낮추고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많은 고통이 있었다. 성추행하는 거래처부터 인격살인하는 상사까지 무수한 고난을 겪고 그래도 버텨보려고 발버둥 쳤고 포기하지 않으려도 악착같이 버텼다. 멍청했다. 아닌 것 같으면 빨리 나와서 새로운 회사를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냥 버티다 버티다 몸에 병을 얻으면 그만두곤 했다. 포기하기 싫어서 그런 건데 때로는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그땐 몰랐다. 결국 그 모든 일들이 내 커리어가 되어 난 정말 볼품없는 커리어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지금 난 백수다. 누굴 탓하랴.
너무 영화를 드라마를 많아 봤나 보다. 이런 나를 흙속에 보석으로 알고 다듬어줄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는 미친 환상을 꿈꾸었다. 이제 드라마를 그만 봐야겠다.
며칠 전 곧 80이 되시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살아온 인생에서 후회되거나 아쉬운 게 있어?”
“나는 딴 거보다 아껴서 산다고 굶는 것도 아닌데 너희들한테 메이커 옷이나 비싼 음식 못 사준 게 그렇게 후회가 되네.. 아껴서 살았다고 해서 지금 떵떵거리고 사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궁상떨고 살았는지….”
난 사실 엄마가 더 배우지 못한 것 혹은 여행이나 뭐 그런 것들로 후회하지 않으실까 했는데 역시나 후회되는 일은 자식들에 관한 것이었다.
난 지금 무엇이 후회되는가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후회가 된다.
어릴 때 배우고 싶은 미술을 배우게 해달라고 떼쓰지 않았던 것도 후회되고 고3 때 수능을 망치고 재수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시는 엄마를 설득하지 못한 것도 후회되고 쓸데없이 창업한답시고 작은 회사만 골라 들어가서 커리어를 엉망으로 만든 것도 후회되고 돈에 관심 없던 것도 후회되고 사람관리 못한 것, 사람 보는 눈이 없던 것 등등 모든 일이 후회되는 일들뿐이다.
벌써 인생에 반은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후회되는 인생만 살아왔을까? 최소한 주위사람들은 결혼해서 애도 낳고 인스타를 보면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대체 그들은 무슨 일을 하면서 그렇게 좋은 집에, 차에 행복에 겨워 살 수 있는 걸까?) 나는 회사도 잘리고 취직도 못한 채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게 너무 소름이 끼치게 싫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잘 알겠는데 이걸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얘기를 했다.
“나 너무 힘들어. 정말 그만하고 싶어. 당신도 내 삶도 다”
그 말을 들은 남자 친구는 환하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즘 많이 힘들구나. 그런데 그건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일이야. 당신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일인 거 잘 알잖아. 지금 회사가 안 구해지니 어쩌겠어. 알바라도 하면서 버텨야지. 나도 회사 구해지면 주말 알아도 같이 할 테니까 조금만 견뎌보자. 그리고 사랑해.. "
"내가 사랑하니까 괜찮아”
너무 교과서적인 말을 하는 남자 친구말을 들으니 웃음이 났다. 어이없는 웃음이…
난 본인이 먹여 살릴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섭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티브이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사연의 바람이라는 곡을 어르신들이 떼창으로 부르는 장면이 나왔다. 요즘의 내 심정 같은 가사였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운 요즘인데 과연 그 뒤에 가사는 무얼까 하게 만드는 노래였다. 클라이맥스가 되었고 내가 힘들 때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말해주면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는 가사… 사실 난 충격이었다. 그런 삶의 무게를 사랑으로 극복한다라니……그런데 놀라운 건 그 노래를 떼창 하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가장 큰 걸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비록 이런 모양으로 살고는 있지만 전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보고 힘내라고 잘하고 있다고 잘할 거라고 사랑한다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었다. 나이가 들고 가장 필요한 건 어쩌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 난 가진 게 하나도 없지만 나를 믿어주고 나를 사랑해 주는 이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행복감이 벅차올랐다. 둘이 같이 있으면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된 게 너무 감사했다. 난 미친 사람처럼 행복에 겨워 남자 친구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남자 친구는 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친 사람인가??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