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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01. 2024

<패스트 라이브즈>, 간극으로 풀어낸 인연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에 대한 성찰

※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스포일링 있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PD저널=홍수정 영화평론가] 최근 <파묘>가 천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돌풍을 일으키는 동안, 이 작은 영화는 조용히 스크린에서 자기만의 오묘한 빛을 발하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 이야기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화려한 수상 이력으로 주목받았다. 제58회 전미 비평가 협회 작품상, 제44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영화상.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거창한 수식어로만 남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그 안에 '진짜'가 있으니까. 이 영화만큼이나 사랑과 관계에 대해 차분히 성찰하는 작품이 최근에는 없었다. 그래서 향이 좋은 사람이 떠난 자리처럼 무언가가 계속 은은하게 남는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영화를 생각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간극'의 영화다. 거리의 간극, 시간의 간극, 정서의 간극. 그리고 그 틈새에는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의 결들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영화의 시작에서 노라(그레타 리)는 한국을, 해성(유태오)을 떠난다. 거리의 간극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노라가 해성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을 때. 그래서 노트북을 통해 화상 통화를 주고받을 때. 안부 연락 같지만 실은 연애를 하는 듯한 그 간지러운 시간. 그들이 화상 통화를 하며 주고받는 대화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 차가 발생한다. 원거리 통화의 특성이다. 노라가 말을 하고, 해성이 거기 답하기까지. 1초 혹은 2초… 약간의 공백. 그런데 <패스트 라이브즈>는 편집해도 될 것 같은 이 '시간차'를 굳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이 통화 중에 서로의 말을 기다리는 시간을 함께 경험한다. 이 순간은 꽤나 설렌다. 그들 사이를 오가는 말이 다정하므로. 말에 마음을 살짝 담아 보내고, 그에 대한 답을 기다리기까지의 1초 혹은 2초. 짧은 시간의 떨림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셀린 송의 재능을 느꼈다. 그녀는 노라와 해성 사이 거리의 간극을 시간차로 변환하고, 그것을 다시 마음의 진동으로 바꾸어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토록 설레는 간극의 연쇄 작용이라니.


해성의 뉴욕 방문에도 '간극'이 있다. 노라가 기대했던 때와, 해성이 실제로 도착한 때 사이의 차이. 해성과 노라의 시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때에 닿지 못하고 안타깝게 비껴간다.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노라와 해성이 짧은 만남을 마무리 짓고 헤어지는 순간이다. 해성이 캐리어를 끌고 택시를 잡으러 갈 때. 두 남녀 사이의 거리는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여전히 정의할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있는 둘. 마지막 순간에 더 강하게 피어나는 애틋함. 짧게나마 서로에게 닿을 것만 같지만, 둘 사이 거리는 끝내 좁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둘의 어린 시절 장면이 등장한다. 거리에 선 해성과 계단 위에 있는 나영(노라). 수줍은 두 아이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가 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이들 사이에 어린 시절 생겨난 그 간극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그 아름답고도 애틋한 거리는 둘을 붙드는 동시에 떨어트려 놓는 힘이라는 것을 말이다. <패스트 라이브즈>가 '간극'의 영화라는 것은 여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하지만 해성과 달리, 전혀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바로 노라의 남편 아서(존 마가로)다. 그는 해성과 달리 적시에 노라 앞에 나타난다. 그 계기가 얼마나 평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노라가 필요로 하는 때에 정확히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잠을 잘 때도, 대화를 할 때도 노라와 시종 꼭 붙어있다. 이것은 그가 해성과 달리 노라와 사이에 간극이 없는 인물, 함께 살아갈 사람임을 보여준다. 


(아서의 말에 따르면) 영화처럼 특별하지만, 손에 닿지 않는 해성. 평범하지만 손에 닿는 아서. 그러나 노라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은 아서다. 이런 운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노라도, <패스트 라이브즈>도, 셀린 송도 고민했을 것 같다. 


그에 대한 영화의 답은 하나다. 인연.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연'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갈래로 활용된다. 먼저 해성과의 만남이 끝내 이어지지 않는 것을 위로할 때다. 비록 만남은 계속되지 않겠지만, 이것도 인연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너와 나 사이의 인연은 대체 얼마나 심오한 것인가. 우리는 수많은 전생에서 함께 했을 것이다. 또 다음 생에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 끝이라 생각하고 슬퍼하지 마. 우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계속 함께이니까. 인연이니까. 


그리고 아서와의 관계도 '인연'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특별하지 않아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계속 함께하는 것이 바로 인연이다. 영화는 이것을 멋진 언어로 표현한다. 노라는 해성에게 떠나는 사람이지만, 아서에게는 남는 사람이다. 그것뿐이다. 인연의 이유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라는 점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인연을 보여주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다. 노라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면서 아서를 향해 달려간다. 그 달음발질의 끝에는 계단에 앉은 아서가 있다. 어린 시절 해성과 나영이 서로를 바라봤던 장면의 구도가 다시 반복된다. 이 순간, 아서는 얼른 일어나 노라를 향해 가서 그녀를 꼭 안아준다. 이 자연스러운 동작이 감동스러운 이유는, 노라와 해성 사이의 간극이 마치 질긴 운명처럼 끝내 좁혀지지 않았음을 우리가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인연이란 그런 것. 어떤 이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도 끝끝내 이어지지 않던 것이 어떤 이와는 너무도 쉽게 이어져 버린다. 이 장면이 뭉클한 것은 가혹할 정도로 오묘한 인연의 천태만상을 우리도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몽글한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인연을 믿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그런 타입이다. 인연이라는 신비롭지만 비과학적인 개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패스트 라이브즈>의 속삭임도 내게는 어여쁘되 약간은 자포자기식의 넋두리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만약 나라면 희생을 감수하고 인연을 만들던가, 아픔을 감수하고 모두 잊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이 맞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방식일 뿐. 그러니 나는 <패스트 라이브즈>를 관람하기 적합한 관객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만 남긴 채 끝나버린 관계를, 이런저런 만남들 사이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를 이토록 필사적으로 이해하고자 몸부림친 적 있었나. 그래서 <패스트 라이브즈>를 존중하게 된다. '인연'이라고밖에 정리할 수 없는 삶의 얼룩을 이 영화는 조용히 품는다. 그 진지한 태도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다지도 공감하지 않지만 존중하게 되는 태도라니. 사람 사이의 간극에서 시작해 여러 감정과 관계를 두루 쓰다듬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온기는 쉽게 지워지지 않아, 여전히 내 안에 남았다. 이걸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인연인가 보다.



출처 : PD저널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5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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