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생충>을 생각할 때 언제나 마음 가는 이가 있었는데, 그 인물은 바로 기정(박소담)이다. 오늘은 기정이 얘기나 해보자.
혹시 나처럼 느낀 사람이 있으려나. 기우(최우식)네 가족에서 기정이 혼자 뭔가 분위기가 살짝 다르다. 그녀의 이질적인 느낌은 여러 장면에서 티가 난다.
다른 분위기
왜 박 사장네 가족이 캠핑 간 틈을 타서, 기우네 가족이 저택에서 술판을 벌이잖아? 그때 기우(최우식)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한다. (기정이는) 우리랑은 달라. 부잣집 분위기에 잘 맞아. 이 집에서 오래 산 느낌? 처음에는 단순히 남매에게 보내는 애정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기우 말이 맞다(얘가 틀린 말은 안 함. 현실파악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확실히 기정이는 기우네 가족과 결이 다르다. 그러니까 아등바등, 빠득빠득 이런 느낌이 별로 없다. 가난에서 뻗어 나오는 독기가 잘 안 보이는 것이다. 이런 면이 기정이의 여유롭고 초연해 보이는 분위기를 만든다.
초연함
기정의 초연함은 집이 수해를 당했던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난다. 물이 찬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가족과 달리 그녀는 오물이 넘치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이 장면 너무 좋음). 아마도 기정이가 아껴뒀던 담배 같다. 물에 잠겨 떠나야 하는 집. 이곳에서 기택(송강호)은 마지막으로 물건을 건지고(기택은 확실히 실리적이다), 기우는 민혁(박서준)이 주고 떠난 수석을 멍하니 쳐다보며, 기정은 이 공간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가져간다. 이 순간에 어떤 태도가 맞고 틀리다며, 감히 그들을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때도 기정이의 성향이 나머지 가족과 확실히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면이 기우가 언급했던 '부잣집 분위기'인지도 모르겠다. 여유가 있는 이들은 현실의 생활고로부터 동떨어져 있어서 평소에는 얼마간 초연해 보이니까(자세히 보면 둘은 확실히 다르지만).
가장 유약한
기정이의 초연함은 매력적이지만,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 초연하다는 것은 현실 앞에서 약간 수동적이라는 말도 된다. 예를 들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유유자적하는 선비는 자기에게 주어진 밥을 그대로 먹지, 조금이라도 더 잘 먹어 보겠다고 이리뛰고 저리뛰지 않을 것이다.
초연한 성향의 애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면 우아한 사람이 되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주변의 먹잇감이 된다. 이런 애들은 자기 것을 하나라도 더 챙기기 위해 벌어지는 살벌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기우네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기정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칼부림 때문인 것으로 나오지만, 굳이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아마 기정이는 이 집에서 가장 먼저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것이다. 자신을 지킬 힘도 없고, 대신 지켜줄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그래서인지 기정은 아빠 기택에게 술김에 "나 좀 신경 써 줘!"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도 나를 이 험한 세상으로부터 지켜달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기택은 다정할 뿐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정이 칼에 찔렸을 때조차, 기택은 박 사장에게 힘 없이 차 키를 넘겨주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다).
<기생충> 스틸컷
나쁜 환경
기정이는 나름 똘똘하고 재치도 있다. 여러 상황에서 능청스럽게 연기도 잘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환경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다. 아빠는 무계획이고 하나 있는 남매는 수시로 범죄 계획을 세운다(ㅋㅋㅋ 아 머리야).
게다가 기정이는 약간 수동적이라, 이런 환경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성향이 있다. 이들의 사기극을 살펴보면, 기우가 아이디어를 내고 기정이 꾀를 보태고 엄마아빠가 합세하는 형국이다. 처음 기우가 과외를 맡으려고 서류 위조를 시도할 때, 기정은 열심히 포토샵을 해가며 후방지원한다. 별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잘한다. ㅋㅋㅋ 비 오는 날 저택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도 기정이는 아빠와 기우에게 "이제 계획이 뭐냐"고 다그칠 뿐이고, 자신이 계획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보다시피 이 가족은 허술하고 자기들이 "이 저택에 살고 있다"고 믿을 만큼 현실인삭 감각이 떨어져서, 완전범죄를 저지를 능력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같이 나락가는 구조다. 그리고 그 타이밍이 왔을 때, 죗값을 가장 크리티컬하게 맞을 사람은 기정이다. 이 집안은 서로를 챙기지 못하고 각개전투하는 집안인데, 가장 생존력이 약하다 보니.
만약 그녀에게 주어진 게 달랐더라면
예를 들어 한 때 운동선수였고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엄마 충숙(장혜진) 같은 성격이라면 기정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충숙은 심지어 칼 든 근세한테 소시지 꼬챙이 들고 맞붙어서 이겨버림). 이 엄마는 수석을 선물한 민혁이한테 "먹을 거나 사 오지"라고 뱉어버릴 정도로 우악스럽고 생활력이 강하다(공교롭게도 이때 이런 엄마를 저지하는 것은 기정이다). 하지만 기정은 엄마처럼 우악스럽게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
혹은 기정이가 아빠처럼 사람 하나 아작 난 상황에서도 "남들이 모르면 끝"이라며 긍정 회로 돌리는 대꽃밭 회피성향이었다면, 계속 현실도피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다 지하에 갇히긴 했지만).하지만 기정이는 이 집 식구들과 다르게 눈치가 빠르고 자기가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기우가 저택의 어떤 방을 갖고 싶냐고 농담처럼 물었을 때도, 그녀는 그런 상상에 동참하지 않는다).
혹은 그녀가 기우처럼 자기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적극적인 타입이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기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똘똘하지만 수동적이고 주변에 끌려간다.
기정이 충숙을 찾는 칼날에 찔린 것은 "정말 상징적"인 사건이다. 기정은 가족의 과오까지 떠안고 비극을 맞는다. 그렇다고 기정이 뭐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같이 잘못을 저질러도 제일 먼저 끌려가서 다른 애들 몫까지 탈탈 털리는 애들 있잖아. 좀 신경쓰이는데 이걸 신경 쓰는 게 맞나 싶은 그런 애. 기정이가 딱 그런 케이스다.
사실 기정이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은 채로 그럭저럭 잘 살았을 것이다. 개념이 부족하지만 먼저 사고 치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반듯한 교육받고 자랐으면 그냥 착하게 지냈을 것 같다. 타고난 끼도 적당히 떨면서 이쁨 받고 살았겠지. 그러니 타고난 성향만큼 중요한 것은 환경과의 궁합이다.
<기생충> 스틸컷
불량품은 누구일까
이 영화의 초반부에 재밌는 대사가 있다. 동네 피잣집 사장님은 피자 박스를 제대로 접지 않은 기우네 가족을 타박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넷 중 하나는 불량인 거지.
그러면서 사장님은 기우네 가족을 쓱 한 번 둘러본다. 이 의미심장한 말은 이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 불량품은 누굴까? 그것은 다름 아닌 기정이다. 이 집안의 부도덕함은 물려받았으면서, 그 결과를 감당할 맷집은 물려받지 못한 인간. 가족과 함께 작당모의할 때 신나게 몰입하다가, 정작 위험한 순간에는 가장 느리게 도망치는 인간.
몸은 기우네 가족과 머물지만 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기정은 불량품이다. 하지만 그녀는 매력적인 불량품이다. 그녀는 저택에서 머물다가 수해 맞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일련의 사건들이 선사하는 허탈함을 온 몸으로 느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어쩐지 마음이 간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영화 속 인물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현실에 저런 애가 있으면 속 터져서 어떻게 보고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