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쌤, 내일부터 아침 6시에 방에 와서 우리 좀 깨워줘. 꼭 부탁해."
말은 부탁이지만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아침마다 1년 차 레지던트 두 명을 깨워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선배가 하라면 해야지 어쩌겠는가.
정형외과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동기 인턴들이 정형외과에만 가면 씻지도 않고, 걸어 다니면서 졸고(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숙소에만 오면 구시렁구시렁 욕을 하곤 하더니 내가 그러고 있었다. 정말 미쳐버릴 만큼 바쁘고 힘든 곳이었다. 4주의 근무 기간 동안 휴일은 딱 4일이었다. 한 주는 토요일, 다음 주는 일요일, 이렇게 일주일 동안 딱 하루를 쉬었다. 아, 물론 휴일이 아닌 날은 퇴근도 없다는 말이다. 주 6일 근무가 아니고 주 6일 당직이다.
두 명의 인턴이 정형외과에 배정되었는데 한 명은 병동에서 일하고 한 명은 수술방에서 일했다. 나는 수술방에서 일했는데 일하기 전까지는 정형외과가 이렇게나 수술이 많고 바쁜 곳인지 몰랐다. 한쪽 방에서 수술이 끝날 때가 되면 다른 방을 미리 준비하고 그 중간에 또 다른 방을 준비하고, 수술이 끝난 방은 정리하고, 그 와중에 응급수술이 생기면 또 하고, 또 하고. 수술방에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들은 다 정형외과 사람들이었다. 무겁고 복잡한 수술기구들을 자주 옮겨야 하는 정형외과 수술 특성상 나 혼자서 2~3개의 수술방을 준비하고 정리하려면 끊임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추워서 수술방이 싫다고 전에 말을 했던가? 추울 시간도 없다.
물론 인턴들보다 1년 차 레지던트들이 더 힘들었다. 하루에 2~3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하루 종일 병동과 수술방을 뛰어다니면서 일한다. 교수들과 2,3,4년 차 레지던트들에게 욕먹는 것은 덤이다. 그나마 인턴들은 '잠깐 왔다 가는 손님' 같은 느낌으로 '쌤'이라고는 불러 주지만 1년 차 레지던트는 정형외과의 막내이자 골칫덩어리 아픈 손가락이었으므로 호칭은 '야' 아니면 이름으로 불렸다. 정형외과는 뼈와 근육을 수술하다 보니 실제로 힘이 많이 필요했고 과거부터 남성들이 주로 지원을 하여 대대로 분위기가 군대 같았다. 오고 가는 말과 행동이 과격했고 규율이 엄격하며 선후배 관계가 철저했다. 때때로 정형외과 의국 밖으로 온갖 모욕과 비속어가 들리면 그 안에는 항상 1년 차가 혼나고 있었다. 무슨 큰 실수를 했길래 저 지경으로 혼날까 싶을 만큼 심한 날도 많았다(사실 항상 그랬다).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도 같은데 어떻게 버티나 싶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나 피곤했던 그들은 알람 따위는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자기 일쑤였고, 이제는 아예 정신줄을 놓았는지 인턴에게 자신들을 직접 깨워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1년 차를 깨우러 갔다.
"선생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귀에 대고 말한다.
선배가 뭐라 뭐라 혼잣말을 하더니 일어나 앉는다. 그러다가 다시 눕는다.
"선생님, 6시가 넘었습니다. 지금 일어나셔야 합니다." 내가 다시 말한다.
"어, 그래. 나 일어났다." 그가 누워서 말한다.
잠깐 서서 기다린다. 숨소리가 새근새근 자는 소리로 바뀐다.
그의 몸을 흔든다. 세게 흔들면 혼날지도 모르니 일어날 정도지만 너무 과하지는 않게 흔든다.
"선생님, 일어나세요, 제발 좀."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1년 차 둘 다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는 걸 보고 나서야 방에서 나왔다. 이런 일이 며칠간 반복되었다. 깨우면 다시 자고,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눕고. 나도 힘들어죽겠는데 너무 하다 싶었다. 아들 깨우는 아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을, 나보다 나이도 많은 형들을 아침마다 흔들어 깨우는 게 내 일이라니.
며칠 후, 아침. 그날도 똑같이 방에 들어가서 선배 한 명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고 또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깨우고 자고, 깨우고 눕고. "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자고. 그날은 마음의 한계가 왔다. 스스로가 한심해지고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의욕이 다 꺾여버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들을 그냥 두고 방에서 나왔다. 깨우지 않았다. 말 같지도 않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멍청이가 된 느낌이었다. 저렇게 비몽사몽이면 어차피 기억도 못할 텐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버려두고 내 일과를 시작했다.
"인턴쌤, 아침에 나 깨웠니? 늦잠 잤다." 오전에 수술방에서 만난 1년 차가 묻는다. 아마도 2년 차나 3년 차에게 뒤지게 혼났을 것이다.
"네. 깨웠는데 다시 주무신 거 아닐까요?" 내가 말한다.
"일어날 때까지 깨웠어야지..." 그가 말한다.
"분명 일어나서 앉아있는 것까지 보고 나왔습니다." 거짓말이다. 누워서 잘 자고 있는데 그냥 나왔지. 아마 본인도 기억이 안 나니 뭐라고도 못할 것이다.
"... 알았다."
그 후로 '인간 알람' 역할은 점점 흐지부지 되었다. 몇 번 깨우는 척만 하고 거짓말을 했더니 더 이상 나에게 묻지 않았다. 거짓말하는 걸 알았는지, 본인들이 시키고도 미안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더 이상 깨우러 가지 않았다. 그들이 불쌍한 마음도 잠깐 들었지만 인턴도 힘들다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이어서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하면 따귀를 때리거나 얼굴에 물을 뿌리거나 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화풀이를 하는 것도 좋았겠다 싶지만, 그들도 나름 선배라고 흔들어 깨우는 것도 조심스러웠던 과거의 내가 안쓰러울 뿐이다.
온갖 일을 다하는 것이 인턴이라고는 하지만 '알람' 역할까지 할 줄이야. 자존감이 바닥을 보이던 시기였다. 의사다운 일은 언제부터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깨끗하고 반반한 가운을 입고 청진기도 목에 두른 채로 회진을 이끌어가는 나의 모습. 스스로 결정해서 처방도 내리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자세히 설명도 할 수 있는 주도적인 모습. 응급환자가 생기면 듬직하게 버티고 서서 "에피네프린* 주세요.", "C-line** 준비해 주세요." 같은 말도 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원했다. "선생님, 일어나세요." 같은 소리나 하고 앉아 있자니 모두 다 먼 미래의 일 같다. 인간 알람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 속의 미래.
*에피네프린: epinephrine. 심장수축력 증가, 심박수 증가, 혈압 상승, 기관지 확장 등의 작용을 하여 심정지 및 쇼크 상태, 아나필락시스 등의 응급상황에 사용하는 약물.
**C-line: central line. 중심정맥관. 대량의 수액 및 수혈, 승압제(혈압을 올리는 약), 각종 응급 상황에 투여할 약물들을 효과적이고도 안전하게 투여할 수 있도록 말초정맥보다 굵은 중심정맥에 삽입하는 관. 주로 경정맥, 쇄골하정맥 등에 삽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