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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Oct 29. 2024

33시간의 비행-
브라질리아에서 상하이까지

04. 여섯번째 공관 이임 - 상념, 두려움, 설레임 그리고 새로운 시작

* 상하이의 와이탄의 야경(2024.10.11.)


생각해 보니 벌써 7번째다.

외교부로 들어와서 15년 동안 거의 2~3년에 한 번씩 사는 곳을 옮긴 것이. 뭐, 이 정도면 나도 역마살 좀 있다는 축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 그런 회사인 줄 당연히 알고 들어왔지만 - 이제는 많이 두 이사 다녔네...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곳에 정착하는 것보다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라 싫지는 않지만.

이역만리에서 살다 보면 이렇게 다양한 사연을 가진 좋은 이들도 만나기도 한다. 그래서 버티는 것.


브라질리아로 왔다고 나에게는 온탕이네 어쩌네 하다 보니 어느덧 또 시간이 흘러 나는 다음 목적지로 떠나게 되었다. 정말 한국에서는 멀고도 먼 비행기로 평균 33시간이 걸리는 브라질리아(스카이스캐너 기준). 한국의 대척점인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를 가는 시간과 몇 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둘 다 남미의 허브인 상파울루 과를류스 국제공항에서 다시 갈아타는 여정이기에 그렇다.


이번에는 중국에 근무하게 되었다.


과거에도 중국은 쉬운 근무지는 아니었지만, 코로나 이후 중국에 대한 선호도는 많이 내려갔다. 굳이 설명을 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져 버렸다. 근무하게 된 이유는 중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중국어 어학등급도 있어서 그렇다나. 그냥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인사라는 것이... 여러 가지 할 말은 많았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구시렁 궁시렁할 나이와 경력은 지나지 않았던가. 가야겠지. 새로운 부임지 소식에 아내도 아들도 알았다고만 했다. 과거처럼 그래도 온탕이니 어쩌니 하면서 애써 낭만을 찾으려 하지는 않았다.

아들은 나와 자주 공놀이를 했던 집 근처 허름한 공터를 떠나는 날까지 아쉬워했다.


그리고 떠날 날이 두 달 안되게 주어졌다.

워낙 먼 곳으로 가니까 이사 준비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각종 현지 생활의 정리, 업무의 인계인수 등등... 떠나는 일상을 감성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주어진다. 누구와 인사하고 누구와 정리하고... 공식적인 관계로 만나던 브라질 사람들이나 다른 대사관 사람들과도 - 늘 그랬듯이 -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젠 익숙해진 모습이다.


그렇게 떠나는 날이 포함된 달로 접어들었다. 사실 요즘은 높은 양반들이 아닌 이상 누가 이임하거나 부임한다고 하는 것이 큰 일은 아니다. 국내나 국외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기에 큰 기대도 없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인사도 없이 어느 날 사라질까라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떠날 때 인사하러 가니 잘 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비운 사람도 있어 씁쓸한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어디서 들었던 것처럼 다 나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일이 있기도 한다. 스웨덴을 떠날 때처럼 깜짝 쇼를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마웠다고 손 편지를 가져다주는 이도 있고, 작은 향초를 주는 사람도 있고,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서 근무했으니 노란 브라질 국대 유니폼을 주는 이도 있었다.

브라질 축구 국대 유니폼-호나우두의 9번이다

그들은 내가 가장 밥을 많이 산 이도 아니고, 어려움이 있거나 필요할 때 많이 도와준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직급이 높거나 돈이 많은 직원들도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내가 그랬던 것을 기억하고 표현해 준 것이다.


그래 생각해 보니 전에도 그런 사람들은 있었는데, 점점 그런 이들이 남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니 더욱. 어차피 그들도 잊힐 테지만. 공항까지 배웅 나온 이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고마웠고, 있을 때 좀 더 잘해줄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시간도 돈도 없어지는 마당에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같이 될 인연들에는 점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교훈도 얻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지나갔던 것 같다. 그것도 모르고 너무 많은 사람에게 시간과 돈, 그리고 애정을 낭비한 것 같다. 늦은 후회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더 늦기 전 깨달은 교훈이다.


공항에 마지막 배웅을 나와준 고마운 이들. 항상 잊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브라질리아를 떠났다.


10년 전 아들이 6살일 때 떠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비하면 아들은 어린이에서 소년으로 자랐고, 그땐 얘가 30시간이 넘는 긴 여정을 잘 버틸있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지금은 한몫을 충분히 할 만큼 컸다. 아들은 크면 든든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브라질리아 살던 집에서 마지막 컷을 한 아들. 그의 유쾌함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그리고 고맙다.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하니 자정이 다된 시간인데 삭막한 브라질 생활에 단비같이 웃음과 정을 주었던 동료직원이 배웅차 나와주었다. 너무 생각지도 못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두번째 비행기를 기다리며 우울모드가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조금 바뀌었다.  


브라질리아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상파울루에서 환승을 하며 완전히 브라질을 벗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상파울루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봤다. 브라질에서의 생활에 대한 묘한 추억과 부모형제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한국과 가까워진다는 생각, 또 왜 이렇게 멀리 그리고 가족들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고생시킬까하는 복잡한 심경이 겹쳤다.


아마 아내나 아들도 생각이 많을 것이다. 아들까지도 이젠 어릴 때처럼 우린 아무개네처럼 왜 00에 안가식으로 묻지 않고 눈치를 챘는지 말이 없다. 이젠 아빠가 기분이 우울할까 봐 농담도 건넬 만큼 컸다. 물론 스마트폰에 게임이 또 다른 이유가 되겠지만...


거의 16시간의 비행 끝에 중간 기착지인 두바이에 도착했다. 브라질리아를 떠난 지는 벌써 하루가 지났다. 언젠가부터 장거리 비행을 하면서 바다 위를 지나면 괜한 공포심이 드는데, 이젠 육지 위로 날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놓인다.  


그렇게... 비몽사몽 상태에서 다시 상하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는 그냥 관성의 법칙에 따라가지 아무 생각이 없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 아내는 30시간이 넘는 비행에 기진맥진한 것 같다.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생각 외엔 아무 생각이 없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허리를 구부려보기도 하고 의자를 제치기도 하고 별짓 다하다 보니 도착 30분 전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아... 드디어 33시간의 여정이 마무리되어 간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그랬을까.

이 도시에서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무엇이 그런 생각으로 이끄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어떻게 왔을지 몰라도 잘 지내야 한다는 6번의 재외공관 생활에서 남은 생존본능인가.

상하이의 한강 - 황푸강변의 도착 전 상공에서 찍은 모습


둘러맨 백팩 말고도 6개의 대형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와 마중 나온 공관 직원과 어색한 만남을 가지고 바로 차에 올랐다. 개발이 덜 된 것 같아 곳곳이 수풀로 우거져 초원에 있던 것 같은 브라질리아와 달리 상하이는 서울과 다름없는 대도시의 빽빽한 빌딩들과 차량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온탕냉탕이 아니라 열탕냉탕 수준이다. 참 다이내믹한 인생이다. 아내에게 무심코 내밷었다.

"여기와서 브라질리아가 그리울 줄 꿈에도 몰랐네." 


코로나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도시 봉쇄로 악명이 높았던 상하이는 생각보다 평온했고 편리했다. 도시의 발전 정도는 브라질리아보다 훨씬 뛰어났고, 특히 한국 물품을 비롯해 모든 물자가 풍부했다. 임시숙소인 호텔에서 국수나 만둣국이 나오는 것도 빵 하고 주스만 있던 브라질보다 좋았다. 첫날 도착해 당분간 쓸 물이나 라면을 사러 들어간 슈퍼에서 된장찌개와 육개장을 포장해 와서 숙소에서 한 숟갈 넣으니 감탄이 절로 났다.

"생각보다 좋네."

상하이 도착 첫날, 숙소에 도착해 짐도 풀기 전에 늦은 저녁


원래 장시간 비행하고 오면 시차 때문에 잠이 잘 안 온다. 그래서 그냥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다행히 다음 날은 주말이라 괜찮았다.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그래도 10년 전 칭다오에 근무하면서 진을 빼가며 배웠던 중국어가 조금은 살아나는 느낌이다. 더구나 대만 유학도 했고 결혼 전 상하이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아내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 덕에 집안일에 대한 신경은 좀 덜할 것 같다는 안도감도 든다. 아. 그게 아니라 나만 잘하면 될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상하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사무실 사람들과도 현지 사람들과도 많이 알게 됐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살아가는 재미를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가장 큰 소득은 그동안 체감하지 못한 G2인 중국의 엄청난 발전상을 실감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과거에 그리고 선입감에 잡혀 중국을 바라보는 사이 너무나 커져버린 중국, 과거 중국에 대한 열기가 조금은 식어버린 지금, 나는 그 관심의 잔불을 다시 들추며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다. 이번주엔 7월 23일 브라질리아를 출발한 이삿짐을 받게 된다. 여기서 많이 느끼고 치유하며 살아가고 싶다.


https://youtu.be/O0StKlRHVeE?si=x4qn0bXhaY8ivm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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