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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Nov 04. 2023

오십은 처음이라...

02. 기다리자, 봄처럼.

* 대학1학년, 초봄 교정에서(1992년)


며칠 전 점심을 먹으면서 유튜브를 보는데 노화에 대해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 나오는 동영상을 누르게 되었다. 그래, 나도 이제 좀 건강도 생각하면서 이런 프로그램도 봐야지... 하면서 보았는데, 주된 내용은 오십 대 얼마큼 운동을 하느냐에 따라 요양병원에 들어갈 시기가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그래, 물론 나도 아직은 그런 걸 생각하기엔 이르다 하겠지만, 요즘 운동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미리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어 시청을 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선생님 말씀이...


"....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시면 현재 남성들의 평균 수명이 80 정도니까 그때까지 사실 수 있다는 겁니다."


아, 요즘 뭐 100세 시대라는데 정작 노화에 대해 평생을 연구하고 그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가 얘기하는 게 80이라니. 밥을 먹다가 멍해졌다. 그럼 나는 지금 인생의 반 정도를 살은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밥을 먹고 잠시 소파에 앉아 생각을 해봤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만약에 내게 남은 생이 30이라면 그게 얼마 만에 닥쳐올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그럼 지금부터 30년 전에 뭘 했고 그 30년이란 세월이 빨리 지나간 건지 아니면 느리게 지나간 건지 생각해 봤다.



30년 전이면 대학교 2학년때고 억지로 부모의 기대와 가정 형편에 들어가 초반에 적응을 못했던 대학 생활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을 무렵이었다. 그러다가... 거의 이맘때 11월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고 거의 퇴학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렵게 들어가 이제 막 적응하려는데... 이제 여기서 끝나면 군대에 징집당하겠구나...


학교에서 조사를 받을 때 거의 기말고사가 임박한 때였는데 시험에서 몇 점 맞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결국 나는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중고등학교 때까지 지각한 번 거의 안 했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쫓겨나지 않는 게 어디냐고 달갑게 받았다. 그해 93년 겨울은 참 절망과 쓸쓸함으로 가득 찼던 시기였던 거 같다. 학생들이 겨울방학을 맞아 모두 집으로 돌아간 학교에서 나는 하루종일 40kg 군장을 메고 돌았다. 꼴찌로 입학한 놈이 정학까지 받았으니 뭐 더 망가질 것도 없는 청춘이었다. 특히 우리 학교 같은데서는. 하루하루가 1년 같았고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징계받는 시간은 젊은 나에게 너무 더뎠다.


내 인생에 가장 처참한 때였던 거 같다. 그런데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다음 해 3학년 1학기에 공부나 열심히 해보자 하고 학교 공부에만 매달려보니 그 학기에 1등을 했다. 다시 자신감이 붙었던 거 같다. 2학기에도, 해를 건너 4학년에도 성적은 비슷하게 좋게 나왔다. 다시 봄이 찾아온 것이었다.

롤라스케이트를 처음 타던 어느 겨울날(1993년, 어린이대공원)



그 이후론 어떻게 됐을까? 구구절절 늘어놔 봐야 누구나 술 들어가면 나오는 썰이어서 말하지는 않겠지만, 또 힘든 계절이 찾아왔고 그 시간을 지나다 보니 다시 봄이 또 찾아왔다. 인생이 모두 좋은 일로만 깔렸으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었기에 그 순간순간 중 지루하고 고단한 시간도 많았지만, 종합해 보면 그렇게 먼 시절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아니 아주 어린 시절인 70년대도 아주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총알같이 지났다고 하는 표현이 맞는 거 같다. 전에 부모님이 하루하루는 긴 거 같은데 지나고 나니 정말 세월이 빠르게 가는 것 같다는 말을 요즘 나 또한 느낀다. 30년 전 징계를 받는 그 순간은 너무도 길기만 한 초단위로 셀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금방이다.


그렇기에 "건강하게 운동하면 80까지는 살 수 있다"는 말이 반갑지가 않다. 앞으로의 30년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빨리 갈까...라는 생각에 우울하기 조차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부지런히 열심히 희망을 가지고 살 겁니다.'식으로 마음에도 없으면서 남 앞에서 잘난 체하듯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이 먹고 늙는데 좋을 게 뭐가 있나.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좋지는 않은데, 다만 그렇다고 화내고 불평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람차게 살 것인지 고민해 가면서. 오늘 30년 전을 뒤돌아보며, '아 죽을 것 같이 비참했는데 살아보니 좋을 때도 다시 나타나고 그러다가 또 힘들어지는 게 인생이지. 그러니 오늘 힘들다고 우울할 것도 없고, 오늘 즐겁다고 영원히 즐겁다고 할 필요 없어. 인생은 그렇게 지나가는 거니까.' 아. 그러고 보니 오십이 돼서 달라진 것은 없는데, 이래나 저래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됐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우리 대사관에는 부부 외교관이 있다. 신혼인데, 이달 말에 첫 출산을 맞이한다. 처음 봤을 때 애기같이 보였던 그 여직원이 이제는 배가 남산만 해져도 다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오늘은 그 남편인 직원이 내 방에 와서 뭔가 물어보고 나서 대뜸 이런 얘기를 했다.


"참사관님이 아기 가졌다고 축하해 주시면서 '지금까진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도 잘 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됐었겠지만 이제부턴 당신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많을 거야' 하시던 것이 점점 실감이 납니다. 걱정도 되고요."


그러고 보니 15년 전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팔뚝 정도나 될까 하던 아들놈이 벌써 이제는 나와 키가 비슷해졌지. 언제 저렇게 컸을까. 우는 거와 자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놈이 이젠 어떻게든 나를 속여서 몰래 오락하려고 머리를 구르는 경지에 다다랐으니...

겨우 걸음마를 걷던 돌 겨우지난 아들과(2010년 봄)
나와 아들(2023.10.31.)


내 인생이 얼마나 남은 지 모른다. 재수 없는 얘기는 하기는 싫고, 30년 일지 아니면 누구 말마따나 50년이 될지 모르지만 그저 받아들일 뿐. 30년 전 군장을 메고 뛰던 모습이나 15년 전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모습에서 얻었던 것은 앞날이 어떻게 될지 걱정할 필요도 없고 너무 과신할 필요도 없다는 것 아니었나.


오십이 그나마 나은 것은 전보다는 조금 침착하게 이런 과거의 교훈을 베개로 삼아 큰 한숨을 내쉴 수 있다는 것이겠지. 받아들이고, 그리고 기다리자. 봄처럼.


https://youtu.be/OzQWPnlBLGw?si=zWzSxqzPUes4-giV

뮤직비디오 '봄처럼' (김보경, 2011)



p.s. 오십이 되니, 예전처럼 물어볼 선배도 많지 않아 이렇게 적으면서 스스로 길을 찾으려고 애써본다. 그래서 지금 있는 선배나 형들이 고맙고, 오래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어보고 싶으면 물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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