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아님!
동그라미, 세모, 네모, 직선, 곡선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세요.
(18개. 제한시간 약 15분)
A4용지 3장에는 노란색 정사각형 포스트잇이 각 6개씩 18칸이 붙어있었다.
그림 수업을 듣고 있다. 눈앞에 풍경이나 인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스케치 수업은 아니다.
안 보고 그린다.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을 그린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보면 아는데 딱 맞는 레퍼런스는 없네 싶은 것들. 아니면 아직 본 적은 없는데 보여주고 싶은 상상의 나래들. 내가 보고 싶은 것들. 나도 모르겠는 내 생각들.
수업에서 글자는 금지, 설명도 금지다. 오직 그림으로만 말한다.
뭘 그릴까 하다가, 열림(<>) 닫힘(><) 엘리베이터 버튼이 떠올랐고, 삼각팬티 비키니, 100원짜리 동전, 볼펜, 선글라스... 한 칸에 모든 도형을 다 써야 하는 건 아니죠? 스마트폰, 냉장고… 너무 식상한데? 으 아까 자기소개할 때 광고회사 다닌다고 말하지 말 걸. 괜히 더 창의적으로 그려야 할 것 같잖아! 개기일식,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 태극기 음, 건곤감리 순서가.. 아 맞다 위 아래 위위 아래. 횡단보도와 신호등, 도로 위 뚜껑 열린 맨홀.. 은 좀 너무 갔나? 뭘 그리면 좋을까 떠올릴수록 생각이 막혔고 손도 멈췄다.
수강생들과 그림을 돌려봤고 각자 끌리는 그림을 다섯 장씩 골라 칠판에 붙였다.
명사 / 형용사 / 동사
선생님이 그림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명사를 그린 게 가장 많았다. 평소 생각하는 방식을 알아보는 간단한 심리테스트 같기도 했다. 조금 특별했으면 했던 내 그림들도 명사가 대부분이었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꿔라!’ 자기계발서와 강연에서 유행하던 권고가 생각났고,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이름 긴 철학자의 꾸지람도 떠올랐다.
이런.. 나 이제 꽉 막힌 사람이 되어버린 건가? 실망했다가, 결국 남이 사고하는 방식 레퍼런스 수집 아닌가? 삐딱해지다가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하나, 막힌 데 알았으면 뚫으면 되고 수집해서 내 거 만들면 되지 오히려 좋아 다음 주 수업도 출석이닷! 다짐으로 첫 수업 소감을 마무리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