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현 Mar 25. 2021

먹물 젖은 빵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짧은 단상

 <그리스인 조르바>는 꽤 오래전부터 추천을 받았었는데, 나는 읽기를 미뤄왔다. 두꺼워서도 있었지만, 조르바라는 인물형에 과연 내가 매력을 느낄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르바라는 자유로운 인물을 찬양의 방식으로 타자화하는 먹물의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읽기에 두려웠다. 오늘에야 마침내 완독을 끝냈고, 짧게 단상을 적어본다. (나는 이윤기 번역가의 오래된 판본을 읽었는데, 영역작을 재번역한 특유의 문체가 호불호가 갈릴 듯 하다. 그리스어 직역판이 최근에 나왔다고 하던데, 어떤지 궁금하다)

내 생각은 반쯤 맞고 반쯤 틀렸었다. 예상했던대로 ‘나’는 심각한 먹물이었다. 자기 포장이나 합리화가 거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한 마디로, 계몽인을 계몽하는 완전 계몽적인 스토리였다. ‘나’는 시종 부끄러움을 느낀다. 조르바에 비해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지 계속 탄식한다. 그러면서도 펜을 놓지 못한다. 탄식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나’를 볼때면 대학 때 만난 사람들이 많이 생각났다. 우리는 세계가 어떻고, 진리가 어쩌고, 문학이 이러저러하고, 혁명과 인간의 조건이 어떠한가를 거의 매일 논했다. 나는 그런 대학생활을 했고, 그런 먹물스러움이 내 큰 일부가 되었음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나’와 같이 답답함을 느낄때면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조르바 식으로, 그러니까 ‘바보’가 되어보지는 못한 것이다.


 ‘조르바’를 볼때면 대학이 아닌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생각났다. 내 경우에도 조르바가 있었다. 3개월 간 같은 방을 쓴 훈련소 동기 형이었다. 형은 서른살이었는데, 덩치가 컸다. 대놓고 아저씨였다. 형은 들어오자마자 나이를 물었고, 자기가 제일 형이니 말을 편하게 하자고 했다. 직설적이었지만 그렇게 강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형은 말을 많이 했다. 구보 중에도, 전투화를 닦을 때도, 속옷에 주기를 할 때도, 취침 점호 후에도, 얼차려를 받는 와중에도, 계속 말을 했다. 체력이 남아나는 모양이었다. 형은 자기가 온갖 일을 다 해봤다고 했다. 입소하기 전까지도 노가다 하다 왔다고 했다. 번 돈은 다 술 먹고 여자랑 노는데 썼다고 했다. 형은 우리한테 이상한 말을 많이 가르쳐줬었다. 나는 ‘야리끼리’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형은 낄낄대며 이렇게 말했다. 어, 할당만 마치면 퇴근시간보다 먼저 가게 해주는 거야. 십장이 오늘은 야리끼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일을 한다고 했다. 모두에게 좋은 제도네요, 하자 형은 돌연 표정을 바꾸고 욕을 했다. 야이 새끼야, 공부만 한 새끼야. 그게 어떻게 좋은 거냐? 그러고는 덧붙였다. 니가 어딜가든 야리끼리라고 말하는 놈들은 절대 믿지 마. 그 새끼들은 순 사기꾼 새끼들이야. 나는 다행히 지금까지 야리끼리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이런 서구식 미중년 느낌은 아니었고 형은 좀 더 한국적인, 얼큰한 아저씨였다.

 입만 열면 욕을 퍼부었지만 기본적으로 정이 많고 순한 사람이었다. 자기는 늙어서 힘들다고 하면서도 몸 쓰는 일은 정말 잘했다. 뭐든지 몸으로 배우는 게 장땡이라고 했다. 형은 나처럼 체력이 약한 애들한테 온갖 쌍욕을 하면서 도와줬다. 너같이 공부만한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면서 군장을 들어주고, 총을 들어줬다. 고맙다고 하면 듣기 싫어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물이나 가져오라고 했다. 2주차 쯤에 형은 발목을 심하게 다쳤다. 우리는 후보생이었기에 3개월의 훈련을 모두 마쳐야만 임관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재입대였다. 소대장은 퇴소를 권유했다. 무리하다간 앞으로 발목을 잘 못쓰게 될거라 했다. 그런데 형은 그냥 뛰었다. 내년엔 서른 한살이라 장교로 입대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진짜 그냥 욕하면서 10주를 뛰었다. 안 아프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쌍욕이 날라왔다. 근데 어떻게 참냐고 하면, 조르바처럼 말했다. 아파죽겠는데, 말 걸지 마 새끼야. 말걸면 끊어진다고. 뭐가 끊어지는거냐 묻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 후로 겉으론 형을 걱정하지 않았다. 형은 마지막 날까지 욕하면서 뛰었고, 욕하면서 임관 선서를 했다.


 우리는 뿔뿔이 배치받았고, 나는 형을 2년 후에나 다시 보게 되었다. 형은 더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형은 아래에 따까리들이 2명이나 들어와서 요새 할만 하다고 했다. 다 너처럼 공부만 하던 놈들이라서 멍청한 놈들이라고 했다. 나는 형과 동기라 참 다행이라 느꼈다. 술을 마시고 우리는 담배를 태웠다. 나는 형에게 발목은 괜찮냐고 했다. 형은 그저 킬킬거리면서 코로 연기를 내뿜었다. 세 대를 연달아 피웠다.  


 토론이나 논쟁을 사랑했던 나는 한번도 그의 말에 저항하거나 반박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서부터 반박을 해야할지를 모르기도 했다.(“사내놈이 약해빠져서 워따쓰려하냐? 뭐든지 일단 몸으로 배워봐야 아는거야”) PC하지도 않고(형은 PC개념을 설명해줘도 이해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절반은 욕으로 이루어진 그 확신에 찬 말들에 나는 무력했다. 나라는 인간은 정확히 그 반대편 있었다. 무언가를 해내려면,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믿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어떤 확신도 가져본 적이 없다. 늘 이런식이다. 그냥 부딪혀봐야하는 순간에 고민한다. 그러고 후회한다. 고민하는 것보다 행동을 먼저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고 이성적인 고민을 합리적으로 고민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정말 중요한 것들은 이미 다 흘러가 버렸다. 


 나는 조르바가, 형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조르바>를 읽으면서 계속 걸리는 부분도 많았다. 일단 여성혐오가 심하다. 나는 텍스트, 특히 과거의 텍스트를 현재의 도덕으로 읽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바>는 편히 읽기 쉽지 않았다. 턱턱 걸렸다. 내용의 절반이 (지금의 관점으로) 성적 대상화이고, 남자다움에 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장광연설은 역겹기 까지 했다. 나는 약자를 대상화시키면서 얻는 고귀한 깨달음만큼 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르바>의 주제의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교양없음’이 교양 있는 것들의 폐부를 찌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장치임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시간대의 독자에게 불쾌감을 일으키고, 주제의식을 모호하게 만든다면 그 텍스트는 약한 텍스트가 아닌가. 고전이라 불리울 수 있는가. 


 그러나 지난한 텍스트를 넘어서다보면 등정의 감동같은 것이 어떤 정상에서부터 서서히 불어닥치기 시작한다. 태고적의 욕망, 순수한 육체의 즐거움. 우리의 영혼이 죽지 않고 존재해왔다는 옅은 비감 따위가 페이지를 휘감는다. 조르바는 무언가를 상징하지 않는다. ‘상징할 수 없음’의 표상이다. 그렇기에 그를 바라보며 ‘나’는 경외감과,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텍스트 따위에선 느낄 수 없었던 어떤 진짜라는 감각들.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데 늘 실패함으로써 절망적인 희망을 얻는다. 텍스트와 결부되지 않는 비극적인 생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그리고는 다시 좌절한다.    

  <조르바>는 지식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겨누는 깨어진 술병 조각이다.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거친 쇠붙이다. 그들을 ‘생’이라는 이파리의 끝으로 밀고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조르바는 ‘주체’의 상징인 동시에, ‘나’의 성장을 위해 철저하게 고안된 객체이기도 하다. ‘나’는 조르바에게 끝없이 감탄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은근히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다. 계속 펜을 잡고 쓴다. 조르바의 죽음을 예견한 순간부터는, 아예 조르바에 대해서 책을 쓴다. 결국 그는 조르바가 마지막까지 만나고 싶어 했던 인물로 남는다. 굽히지 않고 극단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유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나는 이따금씩 몰입해서 글을 쏟아낸다. 그리고 깊은 환멸감으로 지워버린다. 희열을 느끼며 쓰고 나서, 내가 쓴 것이 자족적이고 헛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나는 삶을, 일상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민하지 않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으로써, 나는 무의미한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들어앉는다. 환희의 바다 목전에 모래성을 치고 스스로 영주라 칭하는 꼴이다.


썰물과 밀물이 일정한 주기를 갖고 들이차는 감정의 만에서, 나는 조르바를 바라본다. 내가 만약 2주차에 발목을 다쳤다면, 나는 퇴소하고 다음 차수에 입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조르바는 나를 멸시하며 춤을 춘다. 하늘로 승천할 듯이 뛰어오르며 춤을 춘다. 그가 지면에 착지할 때마다, 나는 멀쩡한 발목이 시린 것을 느낀다.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SF에 가까웠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간형을 지극히 과학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있었다.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형태의 삶을 제시하고, 섬세하게 관찰한다.’나’는 ‘조르바’라는 존재의 타당성을 검증한다. 번번이 실패한다. 무한한 우주는 인간에 의해 늘 부분적으로 이해될 뿐이며, 그것이 SF가 진실을 환기하는 방식이다. 관측하는 도구가 미래적일수록 경외감은 커진다. ‘나’의 철학적 사변은 하이테크 도구와 같았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간이라는 경외할만한 존재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빚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이 먹물들을 위한 시금석이라고 느낀다. 먹물들은, 죽기 전까지 결코 조르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보’가 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족속이니까. 그러나 스스로 바보조차 될 수 없음을 아는 먹물은, 인간으로 나아갈 문을 열 자격은 갖게 된다.


책을 덮고 나는 산투르 소리가 궁금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dzlcxN0lxSo 

빌어먹을 외국 먹물들의 댓글이 재미있다.(Zorba Dances everywhere. It’s always there.) 악마나 잡아갈 조르바는 죽지도 않고 살아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애연의 사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