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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현 Mar 08. 2022

<무지한 스승>에 대한 고찰

<죽은시인의 사회>, <GTO> - 보편적 가르침이란 가능한가 

1.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줄곧, 나는 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입시와 함께 현실적인 선택을 하며 스러진 욕망이지만. 내가 교사가 되고 싶은 데에는 다음의 두 작품이 영향을 크게 미쳤었다. 하나는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죽은 시인의 사회>, 다른 하나는 후지사와 토오루의 <GTO(그레이트 티쳐 오니즈카)> 였다. 두 작품의 톤앤매너는 완전히 다르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들이 제시하는 교사의 표상은 비슷했다. 기존 지식의 답습에 매몰된 공교육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독려하는 교사. 차이가 있다면 <시인>의 키팅 선생은 제도권에 속해있는 교양있는 엘리트 교사이나 <GTO>의 오니즈카는 90년대 일본문화에서 자주 그려지는, 호색한이나 솔직하고 유쾌한 폭주족 출신 교사라는 점이지만. 


 <시인>의 키팅은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길을 가거라. 바보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간에


<GTO>의 오니즈카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같은 건 상관없어요. 열넷이든 아흔넷이든 자기 소갈머리는, 자기가 넓히는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걸 가르쳐주는 게 우리 교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에 이런 말들은 내게 일말의 해방구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초반 한국 공교육의 분위기는 자뭇 살벌했다. <시인>은 90년대 작품이고, <GTO>는 97년도 작품이다. 문화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 예컨대 <시인>의 학교는 명망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는 미국 명문 사립 아카데미이고, <GTO>의 학교는 이름뿐인 명문인 이지메와 폭력이 난무하는 사립 중학교가 배경이다 - 두 작품은 동일하게 ‘입시’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상호 폭력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폭력은 자살, 왕따, 린치와 같은 작품 속 풍랑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 원류는 랑시에르가 말한 ‘바보 만들기’(abrutissement) 에 있다. 


2.

 ‘입시’는 명징한 위계를 만든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시’는 공교육이 전제한 교사-학생간 지능의 상호 불평등성을 정당화하는 기계로 기능한다. 


‘바보를 만드는 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을 학생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늙어빠진 둔한 스승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를 만드는 자는 유식하고 식견있으며, 선의를 가졌을 수록 더 유능하다. (중략)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엇보다 학생은 이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그 학생에게 항상 더 잘 설명해주어야 한다.(중략) 불행하게도 식견있는 자들이 쓰는 이 대수롭지 않은 단어, 이 이해하자 라는 슬로건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 단어 때문에 이성의 운동은 멈추고, 이성에 대한 신뢰는 파괴된다. 그 단어는 지능의 세계를 둘로 쪼갠다. (후략)(무지한 스승 中, 자크 랑시에르)


1987년도에 출판된 <무지한 스승>은 다소 생뚱맞게 “1818년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모험을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프랑스인인 자코토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야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그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자코토는 그래도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생들과 공통된 어떤 것/사물로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맺기 위해, 당시 출간된 ‘텔레마코스의 모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교재로 사용했다. 자코토는 통역으로 학생들에게 그 책을 주고,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사용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번역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러한 계몽주의 풍의 교육 실험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학생들은 읽은 내용 전부에 대해 프랑스어로 써보도록 주문받았고, 자코토는 끔찍한 결과를 예상했다. 


그러나 그 우연한 실험은 자코토의 정신에 거대한 혁명을 일으켰다. 철자법과 동사 변화도 설명해주지 않은 학생들은 자신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어 단어와 어미변화 이치를 스스로 찾아냈다. 그들은 혼자서 단어를 조합해 프랑스어 문장을 만드는 법을 익혔다. 자코토가 학생들에게 한 것은 그저 번역을 주문하고, 그 과정을 주의깊게 독려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러한 결과는 우리가 갖고 있는 교육학의 신화를 흔든다. 교육학의 신화는 세계를 둘로 분할하는데, 곧 열등한 지능과 우월한 지능으로 분할한다. 그 순간 두 지능간의 거리가 상상되고, 그 거리를 메우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 된다. 우월한 지능을 갖춘 이는 스승으로 자신의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추어 전달할 수 있고, 학생이 배운 걸 제대로 이해했는지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설명의 원리이고 - 자코토가 말하는 ‘바보만들기’의 원리이다. 자코토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지능을 조금도 쓸수 없었다. 그 덕에 교육학의 바보 만들기 원리인 그 ‘상상적 거리’는 제거되었던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학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학생의 지능이 쉼없이 실행되도록 강제하는 의지에 달려있던 것이다.


 자코토는 이러한 우연적 실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모든 인간의 지능은 동일하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의지이며, 교사의 역할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그러한 앎의 의지에 대한 세심한 주의라는 것. 그는 스승은 자신의 앎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갖고 있는 ‘알지 못함’이라는 상태에서 앎에의 의지를 해방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역설이 도출된다 - 좋은 스승은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다. 그는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대상에 대한 주의깊은 관심만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무지한 스승’이라는 발칙한 개념이 대두된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통념 - 가진 능력이 다르고, 그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는 믿음


 자코토는 무지한 스승의 모습을 통해 근대 교육학이 내포한 불평등주의적 논리를 논파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 지식을 가진 교육자라도, 자기가 가진 앎과 학생의 무지를 구분하며 시작한다. 교육자는 학생의 무지를 앎으로 전환하면서도 무지와 앎의 축소될수 없는 거리를 유지한다. 마치 제논의 역설처럼. 앎의 진보는 오로지 선생의 손에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한 스승은 이러한 불평등의 논리를 알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교사가 말한것을 학생이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화자와 청자 간 지적 평등을 전제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근대 교육학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얼핏 보기엔 선해보이는 기존 스승의 역할이 실은 지능의 불평등함을 지속하고, 종래엔 ‘자기 무시’로 귀결시킨다는 점. 그는 근본적인 지적 악은 ‘무지’가 아니라 ‘무시’라고 말한다. 나는 이해 못해요, 난 배울 필요가 없어요 라고 토로하게끔 만드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사회에서 배분된 서열적 자리들이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속된 말로 잘난척하는 멍청이들을 속으로 비위 상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그가 자기보다 높은 지능을 가졌으리라 속단하고 체념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네가 다른 모두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라’라는 것, 지적인 평등이란 ‘아무나가 가진 능력’ 이라는 것, 그것이 이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인 것이다.


3.

 이러한 ‘바보 만들기’를 시작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무시’로 귀결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도처한 폭력의 원류가 된다. <시인> 과 <GTO>가 싸우는 대상이 바로 이러한 교육학적 폭력의 논리이다. 키팅 선생이 말 중,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는 얼핏 보기엔 평등의 원리와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바보 만들기’의 공교육의 논리가 ‘나는 열등한 지능이다’ 라는 주문을 통해 비독창성을 강요한다는 배경을 고려하면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능이란 아무나가 가진 능력이지만,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나는 무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독창성에 대한 혹독한 인식이 요구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개체이며 그로인해 무시될 수 없다. 독창성의 방점이 우선적으로 ‘독’에 초점이 - 그리고 그 후에 ‘창’에 - 맞춰져야하는 까닭이다. 

GTO의 주인공 오니즈카는, 무지한 스승의 가장 적절한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GTO>는 이러한 원리를 조금 더 직설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자기 소갈머리는 자기가 넓혀야한다’ 는 말은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앎에의 의지임을 환기한다. 앎에의 의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교사의 역할이라는 말은, ‘무지한 스승’이라는 이미지와 적확하게 오버랩된다. 오니즈카는 무식하고, 무지하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 - IQ 180D의 멘사도 있다 - 은 그보다 똑똑하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자기를 무시해도 스스로를 무시하지 않고, 어떤 학생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가 무시하는 것은, 학생들을 쓰레기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 자칭 지적인 교사들 뿐이다. 


 <무지한 스승>은 단순히 교육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바보 만들기’를 토대로 대중들을 ‘자기무시’로 귀결시키는 현대의 시스템 자체를 비판한다. 지능의 해방, 평등의 시작은 ‘앎에의 의지’에서 도래한다. 훌륭한 교육은 그 분야의 전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대해 앎의 의지를 갖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뛰어난 음악 선생은 콩쿨에서 상을 받는 음악 천재를 만드는 선생이 아니라, ‘나도 음악가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학생들을 만드는 선생이라는 것이다. 마치 <일 포스티노>의 네루다처럼.

영화 <일 포스티노> 네루다는 가르침 없이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스스로 '메타포' 개념을 깨우치게 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내가 어렴풋이 느꼈던 그 폭력의 감도를 떠올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옅은 비릿함이 느껴지던 교실은 늘 건조했다. 벽보에는 모의고사 성적이 붙었고, 전교 X등이라는 말에는 등수별로 이미지가 붙었다. 2등은 열심히 하지만 만년 2등, 3등은 어정쩡하지만 능력있는 애. 쟤 전교 1 등이래, 라는 말은 아직도 무언가 동경을 넘어 섬짓한 느낌을 준다. 오래된 기억의 방 속 은근한 비릿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는 커녕 더 선명해지고, 그곳에 키팅이나 오니즈카가 있기를 바라던 그 어린 마음들에 대한 안쓰러움은 커진다. 


4.

안타깝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무지한 스승이 제도적인 방식으로 구현되기는 어렵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교육이 제도권에 포섭되는 한, 그것은 불평등의 축소만을 목적으로 할 뿐, 평등이 현실태로 존재한다는 랑시에르의 사상을 다시 진보의 고리에 넣을 뿐이다. 평등을 먼저 가정하지 않고서는 정치 자체를 발명할수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다른 이들과 평등하게 말하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공공적인 것을 논하고 구성할 수 있겠냐는 것이 - 바로 그 평등한 능력, 능력의 평등에 기초할 때에만 ‘민주주의’정치는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입장이다. 이는 기존의 전통적인 맑시즘 진보주의 계보와는 다소 결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입장은 진보주의적 교육관과는 사뭇 다르다. 1981년 사회당 출신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부르디외를 계승한 사바리를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하여 개혁을 시도했다. 그들은 지배계급이 특권으로 누리는 고급문화 구별짓기가 학교에서부터 작동하며, 상징폭력의 재생산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인교육, 학내 평등분위기 조성, 낙후된 계급 자녀 맞춤교육을 통한 계급간 학력격차 축소를 주장했다. 


 그러나 1984년 사바리 후임인 장-피에르 슈벤느망은 공화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는 프랑스어 기초 강화, 시험 선별제 강화, 공민교육 강화를 주장했다. 그가 정책근거로 삼은 것은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한 관계가 오히려 학생들의 학습욕구를 불러일이킨다는, 장 클로드 밀네르의 ‘학교에 대하여(1984)’였다. 뒤처지는 아이들을 위해 하향평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지식을 똑같이 전달하는 것이 평등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 그것이 공화적 엘리트주의,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과 지식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두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는 와중에,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황당한 일화를 가지고 개입했던 것이다. 자코토의 사후, 그의 보편적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분투한 아들들은 이렇게 남겼다. “창시자는 그것을 이미 예언했었다.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사실 덧붙였다.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이러한 입장에 대해 후대에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랭 바디우는 랑시에르가 ‘불평등이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평등을 선언하는데 만족할 뿐,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의 실현을 거부하며 자신의 입장으로부터 실천적 결론을 내리거나 예단하기를 중단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보할 뿐’ 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평등주의적 전제에 대한 가정이 명증성이 있음을 보이고, 불평등주의적 언표들을 실천적으로 중단시키는 방안을 제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제도 교육이 평등이나 해방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진보론자들의 모든 개혁시도가 결국 우월한자와 열등한 자, 지배-피지배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뿐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체념적이라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평등의 실현을 약속하는 제도적 프로그램의 불가능성이 곧 해방 정치의 불가능성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존재하는 지적 평등을 위협하는 불평등의 사유에 맞서 지금 여기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보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그로부터 ‘행동’하는 것, 그럼으로써 교육과 평등 그리고 정치에 대한 사유 체제를 다시 짜는 것, 그것이 그가 무지한 스승으로서 요청하는 골자인 셈이다. 



5. 

랑시에르는 이후 비정규직 운동과 거리의 정치에 관한 여러 연구를 수행한다. 제도 밖의 존재, 제도화되지 않은 실천이 조직에 대해 그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배워야한다고.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제도권 내의 교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철학과 운동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가 말한 지능의 평등에 관한 사유는 내가 왜 교사가 되고 싶었는지, 그리고 교육에 계속 끌려 왔는지에 대해 대답해주는 것처럼 느꼈다. 중요한 것은 훌륭한 화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도 화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임을. 나는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고 싶고, 그럼으로써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 삶에 있어 누구나 교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스스로를 무시하는 자는 아무것도 배우고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나의 동경 감옥에 갇혀있던 키팅 선생과 오니즈카 선생을 이제는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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