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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현 May 28. 2019

레트로 바라보기(2)

- 레트로에 대한 2가지 오해


(1) 오해 1 : 레트로는 힙스터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 

2010년 이후 서구 힙스터의 전형적인 이미지 : 뿔테안경, 플라넬 셔츠, 스키니진, 수공예 부츠 등. 우리나라는 어떨까?

 '힙스터' 라는 말은 1940년대 재즈문화에 심취한 팬들을 지칭하는 '힙'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후 흑인 재즈음악에 매혹된 젊은 백인들을 중심으로 ‘힙스터’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후, 힙스터는 90년대 브루클린 등지에 이주해 공동체를 꾸리는 20-30대 예술업계 백인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그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환경친화적이고, 주류에 대항하는 비주류 - 대안 문화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그들은 일단 보이는 것, 즉 패션을 통해 구분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힙스터라는 용어 역시, (부정적인 뉘앙스를 배제한다면) 일반적으로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아직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힙스터들이 패션만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60년대 히피들이 그러하였듯이, 문화적 공유지반과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음악을 공유하고, 식당을 공유하고, 공연장과 전시회를 공유했다. 그 모든 공유는 주류문화를 위시하여 이루어졌다. 주류 팝 음악과는 다른 인디 음악, 이국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식당, 포스트 모던하고 실험적인 공연들. 힙스터들은 보통의 일반과 다른 취향을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았다. 그 과정은 공시적으로 - 즉, 세계 곳곳의 문화들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 , 또 통시적으로 - 이미 지나간 문화들을 재발굴하는 방식으로 -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어떤 힙스터는 60년대풍의 포마드 머리를 했고, 어떤 이는 20년대 아르누보 풍으로 악세사리를 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취향을 목도하고 공유하면서, 마침내 그들은 깨달았다 : 보물은 머나먼 땅이나 미래가 아닌, 지나간 과거에도 충분히 넘칠만큼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세대에서 힙하다는 말은 분명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때론 경멸의 대상이기도 하고, 찬탄의 대상이기도 하며,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시기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오늘 좀 힙한데?’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뿌듯한 감정과 동시에 다소 민망함을 느낀다. (이 경우 나는 래퍼들이 할 만한 포즈를 취하며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그 작은 실천은 꽤 도움이 된다) 누군가 당신에게 ‘너 힙스터지?’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약간의 치욕감을 느낀다. 그러니 감히 말하자면 ‘힙함’은 ‘수치심이 결부된 자부심’이다. 


 힙스터는 기본적으로 중산층의 문화이다. 마치 당시의 백인 청년들이 그랬듯이, 주류문화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주류문화는 기본적으로 그 문화에 동의하는 동일자들을 생산하고, 타자를 양산하고 배제한다. 그래서 타자화된 구성원들, 예컨대 소수인종이나 빈민층은 주류문화를 동경하고 따르는 방식으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초창기 힙스터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구매력이 있는 사회의 정식 구성원, 즉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구별짓기>의 저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중산계급에게는 문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취향과 문화를 모방하고, 획득하고자 하는 절충주의를 본질로 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문화, 즉 지배계급의 취향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배도구(자본)에 의해 본성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은폐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취향은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실천 사이(즉, 구별짓기)에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힙스터들이 자신만의 취향을 위해 지나간 시간을 도굴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해 고심한다. 남들과 다른 음악적 취향, 남들과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그들은 다른 계층과 다름을 증명하고자 한다. 때때로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과시적인 소비를 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내 취향을 위해 이정도 돈과 시간을 쓸 수 있는데, 넌 어때?'

 

 “남들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에 열광할 때, 나는 라디오 헤드와 블러를 덕질했다.

  남들이 한국 축구에 열광하던 2002년, 나는 혼자 테니스 경기를 보았다. 

  남들이 노스페이스 패딩과 아디다스 져지를 입을 때, 나는 일본 스트릿 패션을 입었다.“ 

  그러나 남들이 라디오헤드와 블러를 듣고, 테니스의 황제가 나달이냐 페더라냐, 심지어 조코비치냐로 논쟁하고, 스트릿 패션이 올해의 유행으로 선정되었을 때, 잠깐의 기쁨과 함께 나는 참을 수 없는 허무와 씁쓸함을 느껴 그 모든 것들을 관둘 수 밖에 없었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마 위의 화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글을 읽을 리가 없으니까) 힙스터인 ‘당신’(그리고 나)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개성을 찾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사실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곧, ‘나는 이러이러한 덕질을 해도 내 생활에는 큰 무리가 없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감정의 본질이다. 흑인 재즈문화를 소비하는 백인들은 그렇게 느꼈을 것이고, 힙한 카페를 찾고 힙스터 문화를 좇는 ‘나’ 또한, 어떤 면에선 그런 특권적인 위치에 있음을 조용히 인지하고 있기에. 어쩌면 힙스터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남들과 확고히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남들보다 적당히 우월한 것’일지도 모른다. 힙스터들을 겨냥하는 마케팅의 본질도 그와 같다.      


(1) 당신은 남들과 같은 것, 또는 비싼 명품을 살 필요가 없다 (살 수 없다)

(2)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이다. (사실 중요한 건 가격이지만) 

(3) 남들과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고 싶다면, 이 물건을 사라! (남들도 다 사고 당신은 이 모든 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지만 말이다)      


 힙한 상품들의 전시장을 바라보는 힙스터는 그 자체도 하나의 전시장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소비의 논리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 성별과 세대를 막론하고-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는 모두 잠재적인 힙스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화의 종착점은, 곧 인간의 상품화 - 더 정확히는 상품에 의한 인간의 소비현상 - 이기 때문이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들과 다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이제는 일상어가 된 ‘힙하다’는 말은, ‘상품화가 잘 되었음’를 의미한다. ‘너 오늘 좀 힙하다’ 라는 말은, ‘너 오늘 (연애시장에서) 잘 팔리겠다’를 의미한다. 


 힙한 소비를 하고나서 느끼는 잠깐의 기쁨도, 그리고 밀려오는 공허함을 느끼는 주체는, 상품이 아닌 인간이다. 소비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를 셀링하기 위해 고민한다.  나는 이런 옷을 입으니 다르다. 나는 이런 음악을 들으니 다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부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낀다. 고로 힙스터는, 기성세대가 말하듯 낭비벽이 심한 젊은이들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스테디셀러 상품 그 자체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에 열광하는 중년들, 우리 어머니만 보더라도 말이다)


 힙스터를 특정 세대의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정의한다면, 레트로는 힙스터를 소비하는 주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품소비사회에서 상품과 소비자의 자리바꿈은 일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레트로는 힙스터만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은 무너진다. 오히려 주목해야할 것은, 레트로 - 혹은 힙스터를 규정짓고 구분하려는 시선의 논리, 그리고 의도가 아닐까? 



(2) 오해 2 : 레트로는 복고다. 


<미국대장>님께서 몹시 레트로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

  레트로의 우리말식 표현 - 복고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적잖은 당혹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 일상어에서 ‘복고’라는 말은, 마치 ‘쿨하다’라는 말이 ‘힙하다’로 대체된 것처럼 이미 ‘레트로’라는 단어로 거의 완전히 대체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디자인 용어로서의 '복고'는 다소 예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나는 외래어 동의어를 가진 용어들 중 어느 한쪽의 사용빈도가 특정 분야 내에서 우세한 경우(이 경우 대부분은 외래어가 그런듯하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현상을 더 잘 해석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다. 그렇다면 왜 ‘복고’라는 말은 ‘레트로’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복고’ 라는 말은 힙하지 않으니까


 복고(復古)는 문자 그대로, 옛 것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복고'를 의미하는 단어 'Restoration'은, ’회복‧(건물 따위의)복원‘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복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현재 상태가 (부당하게) 훼손되었음을, 무너져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1660년 영국 크롬웰 정권을 무너뜨린 조지 멍크 장군과 찰스 2세가 그리 생각했듯이, 1840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엘바 섬으로 추방시키고 왕좌를 되찾은 부르봉 왕가가 그러했듯이.

ColdPlay, <Viva La Vida> 앨범 디자인, 음악에서의 복고란 무엇일까?


 문화 영역에서의 복고주의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럽사에서 공화정의 건설은,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휴머니즘)에 근거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확고한 이성이 없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독립해 홀로 설수 없다. 이는 곧 중세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지배층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복고라는 기치 하에 그리스‧로마 시기의 문화인 조화와 질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지배를 자연스럽게 정당화하기 위한 문화적 토양을 일구어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인본주의’의 전면적인 대두는, 곧 그것이 당대에 부재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증명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기야 군사독재정권이 막을 내린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이를 찬양‧미화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어찌 보면 이는 인간사의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당대인들에게 혁명은 지배층의 기계적 교체만을 의미했으니까. 대부분의 그들에게 주체의식이나 고매한 휴머니즘같은 것은 아무리 강조한들 쉽게 자리하기 어려웠다. 결국 고전주의는 결국 인간의 감성‧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사조에 의해 풍파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전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급변하는 정치적 변화과정 속에서 훌륭한 심리적 균형추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복고(주의)는 개인(집단)의 심리적 불안감으로부터 요청된다. 그래서 복고를 가장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이는 변화하는 정치‧문화영역의 주도계급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현재 상태를 ‘병든’ 것으로 진단하고, 그 치료제가 과거의 특정 시기에 있음을 역설한다. 또한 복고는 복원하려는 과거를 자신이 지향하는 미래로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고는 태생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분히 정치적인 용어인 셈이다. 이들은 복고주의를 정서적 균형추로 활용한다. 대중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리하여 낯설게 보이는 새로운 시대가 기실 그렇듯 낯선 것이 아니라고 역설하고, 또 자연스럽게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녹아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께,, 시방 복고라는 것이 대관절 뭐당가?

 그러나 우리 시대의 레트로 감성은, 설령 그것이 현재 상황에 대한 모종의 불만을 표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면에,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아직 레트로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던 시절, 대표적인 ‘복고 드라마’로 흥했던 ‘응답하라 시리즈’를 살펴보자. 주된 화자는 40대가 된 여주인공으로, 현재 시점에서 그녀는 과거를 회상한다.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이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고, 사건의 경과에 따라 극은 현재를 향해 도달한다. 이 과정에서 강조되는 것은 가족의 사랑, 청춘남녀의 애틋한 사랑, 당대의 대중문화 등이다. 드라마의 마지막화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막을 내린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나의 ㅇㅇ이여.“     


 복고에 대한 정의, 즉 무언가가 훼손되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복원하려 하는 욕망에 근거해본다면, <응답하라> 시리즈가 대상하는 것은 ‘뜨겁지 않고, 순수하지 않은 현재’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식었으며, 어떤 순수성을 잃은 걸까? 드라마는 그 답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나름 애청자였던 나로서는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덕선이는 무엇을 잃은 걸까? 이룰 것을 다 이룬 삼천포와 윤윤제는 무엇을 잃은 걸까? … 


 여기에서 레트로와 복고 간의 미묘한 차이점이 발생한다. <응사>에서는 X세대를 주목하지만, 개인주의의 대두와 운동권의 쇠퇴는 다루지 않는다. <응칠>에서는 아이돌 팬클럽 문화를 적극 조명하지만, 당대의 경제적 위기 상황을 보여주는 데에는 소극적이다. 그러다보니 그 시대의 중심적인 가치나 이념 따위를 강조한다기보다는, 가족‧연인 간의 사랑, 혹은 청춘의 꿈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은은하게 환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이는 어떤 시대적 가치, 이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복원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복고주의와는 다르다. 등장인물들에게 있어 지나간 시대는, ‘현재’의 자신이 느끼는 자신의 젊음과 청춘 - 그리고 가족‧연인 간 사랑의 고온성과 순수성을 부각시키는 장치로서 소비될 뿐이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좋은 시절이었던 그 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서툴지만 매순간 충만하고 가족‧연인과의 사랑이 계속될것이고, 모두가 원하는 대로 성공하고, 그리하여 돌이켜 추억해보더라도 그때는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 라고 말할 수 있는 ‘약속된 미래’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장르가 ‘복고’라고 표현되기에 충분치 않다면, 우리는 이를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나는 이를 초기 ‘레트로’ 장르라고 부르고자 한다. 레트로는, 과거의 특정한 시대를 선망하고 회귀를 주장하는 복고와 다르다. 변모한, 혹은 변모해야할 사회를 위한 정서적 균형추로서의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레트로는 찬탈자로부터 왕관을 빼앗지도, 그것을 적법한 주인에게 돌려주지도 않는다. 레트로는 지나간 그 어떤 시대도 선망하지 않는다레트로는 오히려 약속된 미래의 시대를 좇는다. 그러나 레트로의 핵심은, 그 미래가 더 이상 그곳에 없음을 확인할 때 환기되는 즐거움에 있다. 씁쓸함을 머금은 채 미래의 부재를 거듭 확인하고자 나서, 레트로는 이렇게 선언한다 :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의 미래가 되겠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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