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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현 Mar 26. 2021

영화 <소울>

-아주 사적인 소고

1. 

 재즈가 아니었다면, 생각한다. <소울>의 뮤지션이 재즈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락밴드, 랩퍼, 발라더였다면 그 이야기는 어땠을까. 삶의 재-징Jazzing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시킬 수 있었을까.

 재즈라는 장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나는 빌 에반스라는 재즈피아니스트를 좋아한다. 처음 들었던 곡은, 아마 빌 에반스 트리오 시절의 Autumn Leaves 이었을 것이다. 트렌치코트에 중절모까지 잘 갖춰 입은 신사가 낙엽이 지는 거리를 경쾌하게, 그러나 정중한 품위를 잃지 않은 채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즈비평같은 건 잘 모르지만 내게 그의 곡들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여유로운 태도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그의 곡은 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동시에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텐션을 올려야하면서도 침착하게 해야 하는 일들 - 예컨대 쌓인 유리그릇 설거지나, 밀린 수학문제 풀이, 또는 안타깝게도 기한이 정해져있는 글쓰기 -을 할 때면 나는 습관처럼 그의 곡을 듣게 된다.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일화가 있지만 이건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그는 언젠가 당신은 어디에서 영감을 얻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자신의 안에서 나는 목소리에 집중하고 그것이 현실이 될 때까지 연구하라’ 그것은 그의 음악론인 동시에 삶의 자세였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이 ‘즉흥성’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연구하라’는 말은 다소 모순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어떻게? 그런데 우선적으로 주목해야할 지점은 ‘연구하라’보다는 ‘현실이 될 때까지’ 였다.


 <소울>의 문제의식은 그 지점을 교차한다. 불꽃으로 대변되는 어떤 갈망, 구체화되지 않고 낭만화되는 - 그 낭만은 도르테아의 ‘바다와 물고기’설 에서 바삭바삭 바스라진다 -, 그래서 현실과 유리되고 종래에는 무의미한 몰두의 상태(괴물)로 빠지게 하는 열망.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누구에게나 그런 열망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그 열망들은 보통 비현실적인 형태로 있다. 터무니없는 목표, 망상, 그리고 자기비하. ‘자신의 안에서 나는 목소리에 집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이 되게한다’라는 것은 자신의 열망을 낭만화나 이상화시키지 않고 -그로인해 자기파괴로 이어지지 않고-, 본인의 구체적인 현실의 무대로 붙잡아 in내려놓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소울>은 이를 몸이 뒤바뀐다는 클래식한 코미디 설정을 통해 재치 있게 전달해낸다. 강제로 고양이의 몸에 들어간 주인공은, 의도와 상관없이 강제로 자신의 삶을 낭만화되지 않은 방식 -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식 - 으로 목도하게 된다.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던 일상적인 일들, 예컨대 이발사와의 대화, 어머니와의 화해는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다. 이상의 필터만 제거해도, 현실이 더 이상 기존의 억압하는 현실만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후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현실로 내려오게 한 불꽃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하는지. 혹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나는 도르테아와의 대담에서부터 이미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려버렸고, 재-징Jazzing 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빌 에반스 식으로 말하자면 ‘연구’)에 대해 심한 호기심을 느꼈고, 나의 경우엔 불꽃이 무엇인가 자문하기 시작했다.



2.

 불꽃하면 솔직히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영감님에게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저는 .. 지금입니다.’ 라고 말하는 강백호.

 불꽃, 불꽃남자 정대만, 정대만과 싸운 강백호, 영감님에게 최고의… 이런 흐름.

그 씬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나는 클래식한 오타쿠니까.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최고로 이글거리는 순간 같은 건 있다는 얘기다. 그건 찰나일 수도,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그런 순간이겠지만. <소울>의 주인공 존이 그러했듯, 우리는 그 순간을 잊지 않으며 도래하길 기다린다. 얼치기들만 그러는건 아니다. 수많은 위인들도 (상상이지만) 그러지 않았는가. 그런 것 따윈 없다고 믿는 시니컬한 22번 앞에서.


사실 나는 살면서 아직 최고로 뜨거운(?) 순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안 왔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내게도 사사한 불똥 같은 것들이, 파바박 - 하고 튀던, 아직도 종종 멈추어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2008년인가, 2009년이었다. 누구나 싸이월드를 하는 시기였고, 가족처럼 매일 농구하던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은 가상현실에서도 가족, 그러니까 일촌이었다. 괴랄한 일촌명들이 몇 개 떠오르지만, 그만. 여하튼 누가 스타트를 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중에 누군가 짧은 연재 소설을 올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이 세계에서 나는 그 아이와 사귈 수 없지만, 여기선 가능하다.’는 걸 상상력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약간 야설의 점잖은 버전 같은 걸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등장인물들이 다 실존인물들 (아는 사람만 알게끔 가명을 썼지만)이었던지라, 의도치 않게 많은 관심을 끌었고 하나 둘 우리는 각자의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동력은 사춘기 특유의 마음, 그러니까 친구를 시기하면서도 애정 하는 마음이었으므로, 그들과 더 친해지고 싶었던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나는 당시 한국 고전소설에 꽤 관심이 많았는데, 그건 고전에만 있는 예스러운 문체가 뭔가 오버스럽게 느껴졌고 이 사람들도 장난치고 싶었구나 - 싶은 생각에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수전(將帥傳)’이라는 풍자소설을 연재했다. 문장은 이런 식이었다.


 경복국(經復國) 사막년부(社幕年部) 출신 관료 이범련(李範聯)은 태생이 비범하여 날 적부터 수(數)에 능해 전투에서 결코 지는 법이 없었다. … (중략) 그는 호주국에서 온 백인대장 사이만(社李萬)을 일합에 소인수분해(小人水分海) 하였으니, 과연 거구의 장수도 작은 물줄기 되어 덧없이 바다로 흘러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장수전>은 한자는 모두 음차만 반영하고, 소인수분해와 같이 쉬운 단어만 의미를 조금 부여해 핍진성을 높이는 식으로 서술된 풍자소설이었다.(나는 한자를 아예 모르는 수준이다) 다분히 자기 만족으로 썼던 글이었는데, 이게 의외의 대박을 쳤다. 친구들, 친구의 친구, 친구의 여자 친구(?)까지 댓글을 달았고, 조회수가 쭉쭉 올랐다. 겪어보지 못한 짜릿함이었다. 빨리 다음 화를 연재해달라는 요구에 날밤을 새기도 했다. 독자들의 요구를 반영해서 그들을 출연시키기도 하고, 고심 끝에 안하기도 했다. 섭섭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미안, 그 세계는 온전히 내가 만든 세계였으니까. 한 화를 마무리하고, 올리고 나서 계속 댓글을 확인했다. 시간이 늦어 자려고 누우면 다음화가 생각나 몸이 달아오르고 잠을 못 이뤘다. 다시 가서 썼다. 장수전은 총 12화로 완결이 났다.(나는 그 이후로 장편은 무엇도 완결하지 못했다) 후반부에는 스토리 고갈로 다소 허무하게 마무리를 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지만.


 열병 같은 날들이었다. 그건 분명, <소울>식으로 말하자면 불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쓰는 것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생겼고, 쓰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생긴 만큼 두려움도 생겼다. 무언가를 쓸 때면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못 쓰면 어떡하지, 참신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싶은 고민들로 자학하던 나날들. 그것이 불꽃이 남긴 채무였음을 깨달은 나는 뒤늦게 파산신청을 했고 그것으로 끝이 났다, 고 믿었다.


3. 

 <소울>은 디즈니 영화에서는 드물게, 동양철학-특히 불교-의 알레고리에 기반하여 서사를 전개한다. 선불교의 핵심교리인 본증묘수는 이를 가장 잘 나타낸다 :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행 가운데에 깨달음이 있어 깨달음은 끝이 없고, 깨달음 가운데에 수행이 있으므로 수행엔 시작이 없다.’


 이를 <소울>식으로 말하자면 : ‘불꽃을 찾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 불꽃이 깃들어 있으니 불꽃은 없는 적이 없고, 불꽃 속에 가운데에 여정이 있으므로 여정에도 끝이 없다.’ 가 아닐까.

 <소울>의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본증묘수로부터 유리된 우리가 삶을 받아들이는 대개의 방식은 그렇다. 환희의 순간은 늘 뒤안길에, 버거운 시간들은 늘 코앞에 놓여있다. 더 자유롭고, 넓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분투한다. 마음먹은 만큼 나아가지 못한다. 조급증이 심해진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이전의 나와는 안녕이야 !> 단절에 대한 편집증은 분명 현대인들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자기 몸, 손가락 하나라도 절단하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제 마음을 절단하는 일에는 흔쾌하다.


 사실 나는 그 일을 꽤 잘해왔다. 단절을 통해 발전하고 성숙해진다고 믿었다. 지지부진한 것은 싫어, 쿨했다. 차가웠다. 미약해진 열정을 느끼고자 더 냉정해져야한다는 슬픈 역설. 그 순환을 끊기 위해선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성과는 잘 나지 않았다. 흔쾌히 마음을 절단한다. 멋져, 잘하고 있어. 새 살이 함부로 돋는다. 다시, 영업 개시 ! 도축장과 부쳐는 늘 바빴다.


 그는 ‘나’면서 ‘나’를 꾸짖었다. 절대로 불을 꺼뜨리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는, 무척 고귀한 나. 그는 가스라이팅의 달인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을 붙였고 그것만을 찾고 바라보게 했다. 나태하고 감상적인, 그러니까 목표달성에 불필요한 자아들은 자비 없이 도륙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잔인하고 끔찍하지만, 그 일은 다분히 일상적으로, 평화롭고 조용히 일어났다. 발전과 계발이라는 무해한 이름으로 내 자아는 점점 잘려나가 작아졌다.


 <소울>을 보며 나는 날카로운 부끄러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내 자신에게 요구했던 단절들이 떠올랐다. 한 번도 귀를 기울여보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잘라낸 부분들도 많았다. 어쩌면 가장 무정한 나의 부분만이 남은 게 아닐까, 두려웠다.


 나의 불꽃의 한 부분인 ‘글쓰기’. 글을 쓰면서도, 쓰지 않으면서도 늘 무서웠다. 내가 나의 불꽃을 지킨다는 고귀한 취지로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잘라내고, 보여지고 싶은 부분들만 부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결과물은 여지없이 그랬다. 찢고, 지웠다. 도피하고자 글을 쓰지 않고 파산신청을 했었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글에 대한 빚은 글로 갚아야만 한다는 것을, 불꽃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음을, 늦게나마 배웠으니까.


<소울>로 시작한 올해는, 조금 쪽팔리고 한심스럽고 너절한 내 모습도, 묻거나 날려버리기보단 현실로 끌어내려 마주하고 써보는 것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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