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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Dec 06. 2021

#13 21세기에 왕이 태어났다

21세기에 왕이 태어났다. 왕에게 위엄과 존경심은 타고난 것이었다. 응애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를 받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기절해 있던 왕의 어머니마저 무의식 중에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다. 왕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도 이기적이었지만, 누구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왕의 혀에 말이 얹히고, 의식에 논리라는 것이 들어왔을 때부터 왕은 하고 싶은 대로 살며 살았다. 갖고 싶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두 손으로 장난감을 바쳤고, 먹고 싶다고 하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자신의 말에 이상하리만큼 복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왕이 되라는 사람은 없었다. 21세기에 왕이라는 것은 관광상품이거나, 독재를 하기 위한 정당화 도구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왕을 거부했다. 21세기에 태어난 왕은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시대에 늦게 태어난 왕의 숙명이었다. 


실제로 왕 스스로도 자신이 왕의 재목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자신은 약간의 편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것으로 인해서 인생이 좀 더 쉬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을 따르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처음에는 다들 친구였지만 이내 왕의 위엄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는 매일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며 같이 학교 가자고 하는 아이들이 최소 열명 이상이었고, 그마저도 못하는 학생들은 왕을 저 멀리에 서라도 보려고 했다. 선생님들은 왕이 있는 교실에 오면 이상하게 고개를 조금 숙이며 굽신거리며 수업을 진행하였고, 왕과 면담을 하고 나면 왕이 뭔가 어른인 자신보다 더 어른 같다는 생각이 하루 종일 휩싸였다. 선생들은 자신이 왕을 교육하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이 매번 들며, 허투루 가르치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인생에서 최초로 부임했었던 열의로 왕을 가르쳤다. 그해 , 왕이 있는 학교에서는 좋은 학교에 들어간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왕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왕의 명령을 원했다. 그러나 무엇을 명령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왕은, 오늘 햄버거를 먹자. 라던가 오늘은 운동을 하고 싶다던가 하는 시시한 명령만을 할 뿐이었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은 그 시시한 말을 어명으로 받들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말을 지켰다. 주위 사람들은 왕으로 인해서 자신 또한 특별해진다고 생각했다. 왕의 곁이라면 무엇을 해도 좋았고, 무엇을 해도 신성한 의미가 만들어졌다. 왕이 기뻐할 것 같은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기었고, 왕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만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사람들은 왕이 무언가 할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무엇을 할지는 몰랐다. 그에 반면 왕은 달라고 하면 무엇이든 주는 사람들 때문에 생각 외로 욕심이 점점 없어졌다. 왕은 심지어 사랑도 편하게 했다. 좋아한다고 하면 그 사람도 좋아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왕은 자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거나 존경하고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왕이 없는 시대에 어린 왕이 생각할 수 있는 자신의 진로는 국회의원이라던가, 연예인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연예인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특이한 능력을 제일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정치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은 그리하여 대학교 전공을 정치외교학과로 선택했다. 그런데 입학을 하기 전 코로나가 터졌다. 모든 수업이 원격 수업으로 바뀌고 이제 동기들을 인터넷으로 만나게 되었다. 줌 수업 첫째 날, 왕은 어떤 여자를 스크린으로 보았다. 그 여자는 자주 웃었고, 집중할 때 입술을 내미는 습관이 있었다. 왕은 그 여자의 까르륵 거리는 웃음이 좋았다. 어느새 왕은 수업을 틀어놓고 그 여자의 화면을 크게 해서 그 여자만 구경했다. 


어느 날 모든 사람이 줌 수업에서 다 나가고, 어쩌다가 그 여자와 단둘이 남아 있게 되었다. 왕은 "잠시만요"라고 그 여자아이의 퇴장을 멈추었고, 바로 여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뭐래"라는 말을 짧게 남기고, 퇴장했다. 왕의 위엄은 원격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평생 처음 느껴본 거절에 왕은 당혹스러웠다.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여자에게 고백한 왕의 이야기는 모든 학과 사람들한테 퍼졌다. 왕을 겪어보지 않는 자들은 왕에 대해 이리저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왕은 이상한 스토커가 되어 있었다. 안 좋은 소문으로 인해 은근히 따돌림을 당한 왕은, 과제나 팀별 수업에서 유령처럼 취급받았다. 금방이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는 어느새 1학기를 잡아먹고 2학기에도 유지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면 수업이 한 개 생긴 것이었다. 왕은 드디어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 첫날, 왕이 교실 문을 열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왕에게 향했다. 왕은 명령했다. “나를 욕했던 모든 사람은 당장 빤스를 벗고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소리 질러!” 왕의 명령으로 인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지만 왕은 수업 시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한 터라 별일 없이 지나갔다. 그날 이후로 왕은 정치외교학과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왕은 진로에 있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비대면에서 자신의 능력이 무용지물이라면,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성공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왕은 주위 어른들에게 진로 상담을 요청했는데, 모두 하나같이 '뜻대로 하소서'라는 말만 반복하지, 진심 어린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왕은 점점 더 외로워졌다. 부모도, 친구도 자신의 이 특별한 능력이 없다면 좋아해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왕은 보통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문득, 왕은 자신을 거절했던 여자아이가 보이질 않자 궁금했다. 자신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학과 선배에게 물어봤는데, 여자아이 역시 소문 때문에 힘들어해서 다른 학과로 전과했다고 했다. 왕은 여자아이가 보고 싶다고 명했다. 선배는 바로 몇 명의 후배들한테 수소문해서 그 여자아이가 연극 영화과로 전과했으며, 이번에 연극을 공연한다고 답했다. 왕은 그렇게 처음으로 연극을 보았다. 연극에서는 왕도 있었고, 나쁜 왕도 있었으며, 왕을 편하게 대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왕은 연극을 보며 이곳에서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왕 역시 연극 영화과로 전과하기로 결심했다. 전과 시험에서 연기해야 하는 역할은 운 좋게도 왕이었다. 왕이 왕을 연기했다. 교수들은 완벽하다며 기립 박수를 쳤다. 20년을 왕으로 살아온 왕은 그제야 자신의 적성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전과를 하고 나서는 어떠한 연기도 왕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떤 역할의 맡더라도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왕 역할에만 한정적으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왕은 혼란스러웠다. 졸업시즌이 다가오면서 어떻게 해야 먹고살 수 있을지 또다시 두려워졌다. 비대면으로 쓸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왕은 그저 졸업작품으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현재를 살려고 했다. 졸업작품으로 맡은 연기는 헬스 트레이너였다. 최대한 메소드 연기를 하기 위해서 왕은 처음으로 동네에 있는 허름한 헬스장에 등록했다. 매일 닭 가슴살과 셰이크를 주식으로 먹으며 몸을 키우기 시작했다.


두 달 즈음 지나자 헬스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왕의 아우라를 느끼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 회원 한 명이 조심스럽게 운동법에 대해서 물었는데, 왕은 무심하게 '운동을 두 배로 하라'라고 말했다. 명령을 받은 그 회원은 세트를 두 배로 늘리고 토 나오듯 운동하기 시작했다. 말을 어기면 목이 잘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공포가 열정의 근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원의 몸이 몰라보게 변화했다. 스스로의 모습에 감동한 회원은 사람들에게 왕이 있는 헬스장을 소개했다. 왕은 그저 무심하게 '중량을 10kg 더 늘려라' '유산소를 1시간씩 하라' '패스트푸드는 먹지 말라'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노하우를 말했는데, 사람들은 왕의 분부로 받아들여 목숨 걸듯 운동했다. 허름한 헬스장에서 세계대회로 나가는 선수 몇 명을 배출했다.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졸업작품을 연기한 왕은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쓸 곳을 찾게 되었다. 복근에 왕자를 새긴 왕의 몸은 이제는 왕의 위엄이 없어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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