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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효 Jan 01. 2019

예술가와 대중, 가십 메이커는 누구인가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배우의 사생활과 관련하여_

    2017년 3월 배우 김민희는 한국 배우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많은 축하 세례가 있겠지만 그녀의 수상을 둘러싼 여론을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녀는 기혼 남성인 홍상수 감독과 불륜 관계에 있었으며, 그의 영화 출현을 통해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배우 김민희와 감독 홍상수의 불륜 관계는 한국 영화계의 세기의 스캔들이 되었고, 두 사람은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륜 관계가 버젓이 알려진 상황에서 베를린 영화제는 그들에게 큰 상을 내주었고, 한국 대중은 큰 아이러니에 빠졌습니다. 한국의 대중 여론은 사회적 윤리에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관대하지 않으며, 실제로 당시 김민희는 영화 <아가씨>로 좋은 연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 행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해외 영화제 수상시 국가로부터 일반적으로 받는 문화훈장 수여 대상에서 배우 김민희는 제외되었습니다.


    홍상수 김민희 두 사람을 바라보는 언론의 입장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째는 ‘예술가의 사생활과 분리해서 영화를 평가해야 한다’입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예술 따로, 사생활 따로’ 보는 건 현대 합리주의적 시각 때문이다. 이런 서구식 개인주의가 강화될 수록 개인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논의를 유보시켜 왔습니다. 다른 의견은 “부적절한 사생활을 가진 그들에게 상을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였습니다. 스포츠 경향 신문은 해당 사안에 대한 대중의 평가를 무작위로 뽑아 보았고 실제로도 의견은 매우 명확하게 양분 되었습니다.



두 주장 모두 기자들이 만들어 낸 프레임에 빠진 생각입니다


    두 주장 모두 기자들이 만들어 낸 프레임에 빠진 생각입니다. 따라서 두 주장에 매몰되어 논의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째그들의 영화를 좋게 평가하기 위해서 왜 그들의 사생활을 배제하고 평가해야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둘째기존 도덕 관념에 맞지 않다고 하여서 예술이 저평가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더 나아가 예술의 평가 기준은 도덕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느냐가 되어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사생활을 분리해서 예술품을 평가해야한다는 말은 모순된 말입니다. 예술은 결코 창작자의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술품이 주제 의식을 갖고 있는한 창작자의 삶과 주관이 녹아들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문학가 루쉰은 ‘문예는 사회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실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문예는 현재 삶의 체험에서 비롯되고 몸소 느낀 바가 문예 속에 투영된 다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창작자의 사생활과 결부시킬 수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극중 여배우 영희는 한국에서 유부남과의 연애로 인해 괴로워하고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조적으로 묻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며, 그 어떤 영화보다 감독과 배우의 체험과 고민이 녹아 있는 영화입니다. 이렇게 예술가는 자신의 삶으로 몸소 금기를 깨고 질문을 던지는 예술 행위를 하고 있는데, 예술품 평가에 예술가의 사생활을 배제시켜서 평가한다는 것. 그것은 감상자 스스로가 예술가의 사생활을 고려해 예술품을 평가할 때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합 니다.


    둘째로 예술가의 사생활 때문에 예술품 자체의 평가를 거부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존의 관습과 맞지 않다고 하여 예술 자체를 거부하는 모든 행위는 새로운 논의 가능성을 가진 담론을 없애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은 하나의 담론을 만드는 텍스트에 불과합니다. 반면 예술에 대한 평가는 오롯이 감상자의 몫입니다. 예술가의 표현 행위를 거부하고 비난하지 말고, 그들은 왜 저평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왜 낮은 예술성을 갖고 있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배우는 그저 표현할 뿐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예술가의 표현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사생활을 문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기존 윤리 의식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과 예술품을 통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낼 뿐이며, 그 질문에 응답하는 일은 대 중의 몫입니다. 성숙한 대중은 그들이 왜 비판받아야 마땅한지, 우리의 윤리의식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술에 대한 편견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또 한번 의미있는 담론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의 예술 행위를 두고, 감정과 결혼 제도에 관하여 한 번 더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그들의 사생활을 언급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사생활을 분리하여 영화만을 평가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삶을 부정했습니다. 예술품을 향유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예술가의 삶과 행위를 그저 타인의 삶으로 바라보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논의의 장으로 가져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사안에 대해서 대중이 예술에 대해서 가진 편견 두 가지를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술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술가의 역할을 사회에 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에는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없습니다. 예술은 그저 누군가의 표현 수단에 불과하며, 민주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가 자기 표현을 하는 예술 행위 자체를 비난해서 안 됩니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는 말합니다. “내가 불편하 더라도 다른 사람의 표현을 참아야 나도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형 폐지가 극악 한 범죄자의 생명도 보호하지만 인권을 중시하는 사회의 척도로 등장했듯이 사상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때로는 상처를 주고 부작용을 낳는다 하더라도 민주 사회 보편 원칙으로 실천할 가치가 있다.”


    더불어 예술가는 사회에 답을 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술가는 그저 질문을 던질 뿐입니다. 혹자는 예술가가 가진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표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선동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텍스트를 세상에 드러내며, 하나의 담론화를 시킬 뿐입니다. 혹시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응을 주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낸다면 변화가 필요한 이유가 기존 사회에 있었던 것이지, 예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는 권력을 잡기 위해 예술을 하지 않습니 다. 예술가가 가진 힘은 오직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뿐이며, 사회를 변화시킬 힘은 감상자, 즉 대중에게 있습니다. 예술가의 목소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도덕과 윤리를 논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술을 통해 기존의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묻고 답하지 않고, 그들의 불륜 행위에만 관심을 가지는 지에 대해 의문이 남습니다. 단 2명의 예술가의 사생활에 대해서 우리가 과민반응하는 이유는 도덕과 윤리를 논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비판하는 것보다, 기존 당연시 되었던 도덕 법칙을 앞세워 비난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입니다. 더욱이 진짜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영화를 보는 것은 머리 아픈일입니다. 그저 오랜 관습이 되어왔던 도덕 법칙을 내세워 그들을 나쁜 사람들로 낙인 찍혀버리는 것이 편한 일입니다. 애초에 그들이 말하지 않게 되면 휘둘릴 일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한민국 언론의 문제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대중은 언론에 의해 생산된 프레임으로 생각하고 마음껏 비난을 쏟아왔습니다. 그들의 사생활을 분리시켜 봐야지 영화를 좋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는 편협적인 프레임을 1차적으로 생산했습니다. 언론인들은 단 한 번도 기존 결혼 제도와 윤리에 대해 의문을 던진 적이 없습니다. 오직 불륜이라는 가십을 확대 재생산해왔을 뿐입니다. 이로 인해서 대중은 두 사람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대한민국 언론의 자질과 역할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언론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저 대중에게 비난의 장을 깔아줄 뿐입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예술입니까, 언론입니까?



가십 메이커에서 벗어나십시오


    대중은 일찍이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배우의 사생활 문제로 인하여 등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영화제에서 들려 온 여우주연상 수상 낭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이러니에 빠지게 만들었습 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예술성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해외에서는 사생활과 예술품을 분리시켜 작품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술품은 주제 의식을 갖고 있는한 예술가의 삶과 주관이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로 발현된 홍상수, 김민희의 삶은 우리에게 사랑 감정과 결혼 제도 사이의 모순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한국 대중은 사생활과 분리시켜 봐야 인정할 수 있는 영화라고 언급하며, 끝내 그들의 삶을 얘기하기를 기피합니다.


    우리는 예술가와 예술품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용기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된 도덕 법칙 그 잣대 하나만으로 무작정 부정하기 보다는, 그런 사람과 얘기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얘기를 던지고 어떤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는지 귀기울여 새로운 담론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술은 담론을 이끌어 내어 대중을 성숙하게 하고 사회를 진보시킵니다. 그러한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예술가 만의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중의 용기도 필요합니다.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는 얘기’는 가십이 되어 비난과 조롱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사는 얘기를 가십으로 만들 것인지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내는 다양성으로 볼 것인지는 오롯이 대중에게 달렸습니다. 가십 메이커에서 벗어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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