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leblue Apr 17. 2021

01. H에게

식물의 시간

H에게. 

한국은 벌써 봄이 지나간 지 꽤 되었을 텐데 여기 뉴욕은 막 봄인 척하려고 굉장히 애쓰는 중이야. 내가 매일 가는 유니언스퀘어에도 원래 마치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꽃이 만개하더니 봄의 따뜻한 바람을 겨울이 시기했는지 이번 주는 내내 흐리고 비가 오더라. 


우리가 이타카에 살 때부터였을까. 날씨 앱을 매일 들여다보고 그 날 날씨를 보며 한숨 푹푹 쉬던 게. 

뉴욕도 별 다를 게 없어! 매일 날씨 앱을 들여다보고 비나 구름이 있는 날은 유난히 아쉬워. 어차피 회사-집만 왔다가 건데도 해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계속 들고. 이렇게 좋은 봄 날씨가 계속되면 좋겠지만 이 날씨도 한순간이겠지 싶으니 얼른 만끽해야겠어. 


사실 난 요즘 일어나자마자 내가 1주일 전에 발아시켜서 흙에 심어둔 레몬 씨앗이 혹시 오늘은 흙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를 확인해. 아쉽지만 오늘까지 아직 나올 틈이 없어 보이네.

그래도 그 외에 인사하는 친구들은 많아. 작년부터 많은 식물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부끄럽지만 많은 식물들을 떠나보내기도 했어. 이별을 하면서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는 걸까. 과거의 수많은 실수들을 통해 지금은 많은 친구들이 건강하게 내 방을 지켜주고 있으니. 

작년 8월에 새 단장한 essex market에서 사막장미를 데리고 왔는데 좀 기다란 작은 나무 같이 생긴 게 꽃도 피고 아주 오묘한 친구야. 8월에 우리 집에 왔는데 가을이 되는 순간 갑자기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야. 하루하루가 말라 가는 사막장미는 그렇게 가을과 겨울을 보냈어. 겨울이 다가오자 풍성했던 잎은 어디로 가고 뼈대만 있는데 바라만 봐도 마음이 아프더라고.  언젠간 부엌 선반 제일 위에 두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날들이 더 많았어. 근데 내 마음과는 반대로 내가 그 친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자 죽은 지 알았던 사막장미가 푸른 잎을 조금씩 보여주는 거야! 그때 참 기쁘면서도 허탈하기도 했지.


사막장미는 정말 물을 거의 주지 않고 햇빛만 쨍쨍 쬐어줘야 하는 친구인데 내가 신경 쓴다 하고 적어도 2주일에 한번 물을 주니 힘든 기색을 보인 거였어. 

그렇게 좀비처럼 되살아난 사막장미는 아직도 우리 집 창가에 작년보다는 4-5센티 더 커진 모습으로 서있어. 이 사막장미를 시작으로 우리 집엔 총 12개의 반려식물들이 살고 있어. 12개의 다른 식물들을 키우면서 알게 된 건 생각보다 햇빛을 좋아하는 식물들은 많지 않다는 거야. 우리 집엔 직사광선을 하루 종일 쬐는 애들은 사막장미랑 키우고 있는 레몬 씨앗, 그리고 올리브나무밖에 없을 정도야. 어떤 애들은 햇빛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애들도 있고 어떤 애들은 습도가 정말 중요한 애들도 있고 통풍이 중요한 애들도 있고… 각자의 속도로 크기를 키워가고 있는데 초보 가드너인 나는 인내심이 부족해서 어떤 애들을 닦달하기도 하고 과한 관심을 주면서 많은 애들을 떠나보냈어. 그 친구들이 떨군 잎들이 또 나에게 지금의 파릇파릇한 다른 잎으로 찾아온 거 겠지만  이젠 조금 알 거 같아. 봄이 올걸 알면서 겨울을 묵묵히 기다리듯이 그저 이 친구의 속도를 옆에서 응원하기만 하면 봄엔 꽃이 핀다는 걸.


엄청 식물 덕후처럼 얘기를 늘어놔버렸네. 사실 너에게 어떤 식물이 어울릴까 생각 중이었어. 이미 키우고 있을 수도 있지만 너처럼 섬세한 식물 친구가 혹시 있지 않을까 오늘 한번 생각해볼래. 

난 내가 꽃이랑 안 어울리는 사람이 생각해서 그런데 (이건 과연 어디서 오는 생각일까?) 넌 꽃과 잘 어울려. (이것도 어디서 오는 생각일까?) 꼭 꽃을 피는 식물이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머물렀던 이타카에도 이런 식물을 살 수 있는 곳이 있었겠지? 그때는 참 왜 그랬는지 몰라. 식물들 쳐다볼 생각도 안 했는데 안 한 건지 못한 건지. 

난 꽤 이타카에 가까운 곳에 사는 것 같은데 졸업하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5년을 있었던 곳에 그리운 곳이 있냐고 누가 묻는다면 없다고 차갑게 얘기하고 싶지만, 그래도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어. 둘 다 (혹은 나만) 찌든 얼굴로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3-4시쯤 만나서 마셨던 커피가 생각나. 그리운 곳은 아니고 그리운 커피가 될 수 있겠네. 지금은 오후 3시에 마시는 커피가 상상이 안 가지만 그땐 그게 너무 당연했는데 말이지. 무려 그게 3번째 마시는 커피라면서 서로 웃었던 게 생각나. 네가 있는 이타카에서의 시간은 참 소중했는데 그 소중한 시간이 너무 짧아서 더 소중했던 것 같아. 

잘 지내 효준. (매우 급 마무리하는 편지지만 여기 시간은 새벽 1시가 벌써 넘었버렸지 뭐야) 

마치 우다다 달려간 고양이처럼 내 식물 이야기만 잔뜩 하고 또 너랑 있었던 시간을 추억하면서 투정 부리는 친구지만 나의 편지가 너에게 아주 작은 즐거움을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만 갈게!  


앗 궁금했을 사막장미 사진을 첨부할게 :) 


2021년 4월 17일 채은이가. 


작가의 이전글 어제의 불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