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보내는 편지
해명이에게.
벌써 5월이네. 너의 5월은 어떤 냄새가 진한지 궁금하다. 요즘 나는 진한 꽃향기와 점점 무거워지는 공기의 냄새를 맡고 있어. 여름이 온다는 소리겠지? 너가 한 달 전에 눈을 감고 귀를 열어보자라고 내게 보낸 편지 덕분에 나는 길거리를 걸으면서 이어폰을 빼고 소리에 집중하곤 해. 세상엔 참 다양한 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인데 안타깝게도 뉴욕 거리 소리는 그다지 평화롭진 않아. 소리 지르는 사람과 크게 스피커로 본인이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사람과 앰뷸런스 소리가 가득해서 어떤 면에선 다이내믹 하지만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어. 하지만 이런 소리들도 나중에 뉴욕을 떠났을 때 뉴욕을 기억하는 한 방법이 되겠지?
나는 지난주에 필라델피아에 짧게 다녀왔어.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 거리를 여행을 한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겠지만 나에겐 나름 뉴욕주에서 펜실베니아주로 넘어가는 거라 여행 기분이 나더라고. 가자마자 점심을 먹고 간 곳은 barnes foundation이라는 곳이었는데 워낙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미술관이라고 해서 기대를 잔뜩 하고 간 곳이었어. 5년을 건축을 공부하고 (매일 그만둔다고 하면서도) 졸업하고 건축에 몸담으면서 생긴 습관이랄까, 매번 여행을 할 때마다 공부하듯이 꼭 봐야 하는 장소들을 집중적으로 가보는 것 같아. 길지 않은 1박 2일 일정에 3개의 뮤지엄을 넣어버리다니 욕심이 과한 일정이긴 하지만 대도시의 뮤지엄들은 볼게 많은지라 꼭 가보고 싶었어.
예전엔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을 감상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 그냥 내 눈엔 모든 게 멋져 보이고 유명하면 다 "좋은"이라는 딱지를 붙였어. 건축물도 마치 작품을 감상하듯이 개인적인 감상이 가능한 영역인데 마치 유명한 건축물엔 우린 다가갈 수 없는 모나리자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달까. 나도 한동안 그런 얕은 감상에만 머물렀어. 그러다가 barnes foundation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좋은" 건축이라고 습관적으로 딱지를 붙이려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지. 야외정원부터 입구까지 모두 눈길을 끄는 모습의 뮤지엄이었어. 중간중간 들어있는 정원과 (인스타에 올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반응해준 공간) 거대했던 로비에 놓여있는 가구까지 유명한 가구회사 협업해 customize 한 의자로 채워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쓴 부분이 역시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듯 해. 그와 더불어 작품을 걸어놓는 방법도 참 독특했달까. 마치 이 미술관의 주인이자 예술계의 큰 손이었던 반스 씨가 살아있어서 귀신처럼 내 옆을 지키면서 "내 작품들은 이렇게 봐야 해!"라고 잔소리하는 느낌이었지. 중간중간 지나가면서 보게 되는 가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나에겐 압도적인 공간이었어. 숨이 가빠지는 공간이고. 힘을 이렇게 들인 공간인데 나는 그 힘을 다 감상하느라 힘이 빠진 느낌이었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고민과 대화, 그 여정이 얼마나 고됬을지 상상이 갔어. 그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선 의미가 있다면 그것도 좋은 건축이겠지. 얼마나 환경을 고려했는지, 아니면 클라이언트의 가치관이나 신념이 얼마나 잘 반영되었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공간인지, 프로젝트 과정에 참여한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권리는 잘 지켜졌는지, 이런 것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단 말이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들도 신경 쓰다 보면 좋은 건축이라는 질문이 굉장히 개인적으로 변하겠지만 다양한 각도에서의 대화는 모든 분야에서 환영받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어.
물론 내가 설명한 건축에 관한 말은 거창하지만 지금 내가 건축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은 굉장히 사소하고도 사소해! 대부분 하는 일들은 소통이야. 엔지니어링 팀들과 주고받는 질문과 대화들, 소통이 잘 되는 도면을 그리고 오해가 없게끔 명확하게 혹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두리뭉실하게 일부러 표기하는 것들. 아주 작은 부분들을 맡아서 하고 있지고 매우 지루한 부분들이 많지만 내가 하는 것들이 어떤 사람의 좋은 건축은 무엇인가의 대답에 조금 도움이 된다면 뜻깊은 지루함이겠어.
일하기 싫어서 주저리주저리 또 늘어놓았네! 항상 일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또 내 일과 관련된 일을 얘기할 때 이렇게 신나는 거 보면 이 일이 나에게 최악은 아닌 듯싶네. 너도 알다시피 항상 건축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나인데 또 이렇게 의미까지 부여하는 글을 쓰고 있다니 이번 생엔 탈출하긴 글렀어.
앗. 너무 뮤지엄 얘기만 했는데 반스 씨의 컬렉션은 대단했어. 약간 작품으로 플렉스를 하신 분이 아닐까. 작품이 너무 많아서 흔한 설명란도 없고 정말 다닥다닥 벽면을 꽉 채워서 있거든. 르누아르의 작품이 개인으론 가장 많다고 들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모딜리아니 작품들이 많아서 좋았어. 글로만 느꼈던 미술관을 잠시 상상할 수 있게 몇 개의 사진을 남길게.
씩씩한 하루를 보내길.
뉴욕에서 채은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