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좀 쉬려고 온 여행에서 미친 듯이 돌아다녔던 하루. 아침 일찍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호텔 근처의 빅토리아 파크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우산을 들면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크고 울창한 수풀이 우거진 공원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부러웠다. 영국의 영향인 걸까. 우리나라도 양재 시민의 숲 등 좋은 공원(?)들이 몇몇 있지만, 마음먹고 찾아가야 하는 목적지의 개념이라 부담 없이 가기에는 머뭇거리게 된다. 1시간 남짓 공원을 몇 바퀴 돌았는데, 바삐 돌아가는 홍콩 도심의 정경과는 정반대에 있는 슬로우 라이프를 느낄 수 있었다. 운동복을 입고 공원을 조깅하는 사람들, 자리를 펴놓고 수다를 떨며 휴일을 즐기는 가정부들, 강사로 보이는 사람의 자세를 따라 태극권을 하는 노인들 등 참 다채로웠다.
공원을 빠져나와, 트램을 타고 웨스턴 마켓으로 향했다. 이렇게 한적한 기분으로 느릿느릿 제 속도를 벗어나지 않는 트램 안에 앉아있자니 이게 천국이지 싶었다.
만모 사원을 가는 길에 출출해져서 생각 없이 들어간 음식점 '사이융키'. HKD38의 값어치로 작은 행복을 발견했다.
만모 사원을 가고 싶은 이유는 정말 딱히 없었다. 아마 홍콩 관련 읽은 책에서 나왔을 텐데 기억이 안 나니 기억력 하고는 ㅠ 시내에 떡하니 있는 만모사원은 주변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말 오기 잘했다고 생각한 곳. 30여분을 조그만 사원 내부를 빙글빙글 돌다가, 남들 따라서 향 꽂고 기도도 드리고, 뱀띠 부적도 샀다. 정말 부적의 의미라기보다는 나에게는 기념품과도 같은 느낌.
어느덧 점심시간. 장국영이 생전에 즐겨 찾았다던 '예만방'을 가기로 했다. 다시 트램 탑승!
배도 채웠겠다 성 마가렛 성당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영화 '천장지구'에서 죠죠(오천련)와 아화(유덕화)가 결혼식을 올리던 곳. 때마침 사순절 강의 중이라 잠시 듣다가 나왔다. 서양 신부님께서 영어로 강론 중이었다.
다시 역으로 올라가 happy valley 정거장에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로 트램을 타고 향했다. 이런 트램 사랑.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에서 경찰 663(양조위)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며 나오는 아파트에 있는 전 애인에게 인사하던 배경.
에스컬레이터 끝에 다다라 발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소호(soho)까지 와버렸다. 새로 단장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있어서 찾아봤더니 'Tai Kwun-centre for heritage and arts'. central police station과 Central Magistracy, Victoria Prison을 새롭게 꾸며 관광 스폿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소호 거리는 이태원 느낌이 물씬 났고, 다음에 어딜 갈까 하다가 PMQ에서 아이쇼핑을 하기로 했다. PMQ는 최초의 용도인 학교에서 경찰들을 위한 아파트를 거쳐 지금은 예술과 디자인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부터 시작해서 의류, 장신구, 쿠킹 클래스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었다.
다시 배가 슬슬 고파져 첫날 도전했다 실패한 '침차이키' 완탕면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전철 타고 센트럴에서 몽콕으로 이동했다. 이유는? CD Warehouse에서 음반 구경을 하기 위해! 결국 유덕화 시디 4개 고르고 골라 구입했는데, 다 사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고르는 데 거의 1시간을 소비했다.
CD warehouse 가기 전 중간에 들른 곳은 '무간도 3'에서 진영인(양조위)이 사과 우걱우걱 씹으며 걷던 포팅거 스트리트.
이쯤 되니 너무 걷기도 많이 걸어 다리가 시위를 하길래 버스를 타고 움직이기로 했다. 1A 버스 타고 침사추이 스타페리 부두로 이동하며 몽콕 침사추이의 야경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홍콩섬으로 가는 스타페리 타고 야경도 실컷 구경했다. 바람이 심해서 배가 엄청 꿀렁거렸지만 다행히 멀미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성 마가렛 성당의 밤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트램 이용! 트램이 너무 안 와서 한 30분을 기다렸나... 그래도 이것도 좋은 경험이지 싶다. 기다린 보람이 있게 밤의 성마가렛 성당은 정말 예뻤다.
마무리는 세바(SEVVA)에서 칵테일 한 잔으로 하려 했는데, 일요일은 문을 닫는다는 청천벽력에 부랴부랴 검색해서 ALTO라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워낙 고층에 있어 대안으로 즐기기에는 무난했다. 비싼 만큼 서비스도 좋고 분위기도 꽤 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니고도 숙소로 돌아오니 겨우 오후 10시. 알차게 다니다 못해 몸을 거의 혹사시킨 하루였지만 너무 즐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