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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pr 23. 2019

그 겉잡을 수 없는 열병과 깨달음에 대해

열화전차(烈火戰車,Full Throttle), 1995

난 제일 두려운 게 내가 늙었을 때 아무런 추억도 없는 거야.


 도라지의 첫 이미지는 쌉싸름한 맛이지만, 오래 씹으면 씹을수록 의외의 단맛이 우러나온다. 영화 "열화전차(烈火戰車 Full Throttle, 1995)"를 세 번째로 감상하고 난 뒤에, 문득 도라지가 떠올랐다. 그만큼 처음의 인상과 지금의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열화전차"를 처음 접한 건 배우 유덕화(이하 유덕화 아저씨)에게 빠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유덕화 아저씨가 전성기에 동시대에 달리지 못한 건 아쉽지만, "무간도"로 유덕화 아저씨를 알게 되어 필모그래피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열혈남아(원제-몽콕 하문旺角下問, As Tears Go by, 1988)", "천장지구(원제-천약 유정天若有情, 1990)"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열화전차"에서도 그런 거친 반항아의 이미지를 상상했다. 시놉시스와 인물 설명에 따르면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러한 이미지와 부합하기도 했다. 당시 35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부신 외모(라고 쓰고 미모라고 읽는다)에도 정신을 차라지 못했다.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에서 첫인상은 더 굳건해졌다. 불타오르는 청춘들의 이야기이겠구나 넘겨짚은 부분도 있었고, 언뜻 그러한 내용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적어둔 짤막한 감상을 적어본다.


오토바이를 타본 적도, 생각해본 적 조차도 없는데도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들끓게 만들 수가 있구나 싶었다. 주인공 아화(유덕화)의 오토바이 사랑이 열병 수준이라, 보는 사람에게마저 전염되는 듯하다.(후략)


 주인공을 비롯해 주변 인물은 모두 오토바이에 대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오토바이만이 살아가는 목적이며 전부인 아화, 오토바이로 인연을 맺게 된 친구 데이빗, 아화가 레이싱 대회를 나가지 못하지만 그를 존중하고 아끼는 친구 지아러, 레이싱에서도 성적을 따도 그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해 아화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레이싱팀의 팀원들까지-.


 영화 전반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는 감독 이동승(爾冬陞)의 오토바이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 투영되지 않았을까. Shaw Brothers Studio 영화사 소속으로 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1981년 즈음부터 이동승(爾冬陞)은 레이싱에 관심이 많았다. 마카오, 대만, 일본, 동남아시아 등 레이싱 대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고, 급기야 친구들과 팀을 꾸려 대회에 참가도 하였다고 하니, "열화전차"는 그의 무한한 애정이 듬뿍 담길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이렇게 에너지 넘치는 작품을 보면서 오래간만에 나도 모르는 뜨거운 감정이 올라와 한동안 즐거웠다. 더불어 그 감정으로 내가 정말로 추구하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 의미가 깊었다.

그네들의 인생에서 오토바이는, 그리고 레이싱 대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데이빗과 아화

 이러한 열정만이 이 영화의 다가 아님을 영화를 두 번째로 감상하며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단순히 오토바이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더불어 주변 환경과 사람들의 중요성도 말이다.


 아화는 인복이 있음과 동시에 인복이 없기도 하다. 문제의 시발점도 주변 인물이고, 해결점도 주변 인물이다. 해바라기이자 보살 같은 여자 친구 아의와 오토바이로 인연을 맺어 새로 친구가 된 데이빗이 없었으면 아화의 앞날은 어찌 되었을까.  

제멋대로인 아화에게 냉랭하던 아의는 아화의 사고 이후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연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위험천만한 일에도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아화를 말리다가 체념한 아의는 아화에게 줄곧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다 아화가 불법 폭주 중에 큰 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맬 때, 그제야 아화에 대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지극정성으로 아화를 간호한다.


 데이빗은 둘도 없는 사려 깊은 친구이다. 사실 문제의 시초가 데이빗이기도 하지만, 결국 좋은 결말을 맺게 된 것도 데이빗 덕분이기도 하다. 여자 친구 아의와의 관계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아버지와 문제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이 2명은 투닥거려도 결국은 서로를 제일 잘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사이였을지도 모르겠다.

경찰 단속을 피해 오토바이를 숨겨 놓고  데이빗의 집으로 간 아화. 오토바이 소리에 시끄럽다며 면박을 주는 데이빗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화의 눈빛이 기억에 강렬히 남는다.

그렇게 주변 인물에 조금씩 눈이 가던 차에 '열화전차' DVD/블루레이에 눈이 갔다. 스트리밍 서비스에 있는 버전은 북경어 버전이라 배우들의 육성을 듣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워 결국 광동어 버전을 듣고 싶은 마음에 블루레이를 지르고 말았다.

알라딘에서 [블루레이] 열화전차: 777장 풀슬립 한정판을 구매했다. 8장의 포스트카드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세 번째로 감상한 '열화전차'. 비단 아화만이 주인공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저마다의 색채를 띤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 생각이 미쳤다.


 꿈을 맹목적으로 좇는 이.아화는 소통의 부재로 비뚤어지는 바람에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보인다. 여자친구와도 서로 솔직하지 못한 마음에 오해만 커져 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만을 신경 쓰다가 그가 바라는 꿈을 완전하게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 아의는 아화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그가 짚을 이고 불속에 뛰어드는 모양 오토바이에 목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아들과 점차 엇갈리기 시작해, 그 균열이 너무나도 커져버려 아들만을 탓하게 되어버린 이. 아화의 아버지는 아화만 보면 표정을 찌푸리고 말마저 제대로 하려 하지 않는다. 입을 열어도 가시 돋친 소리만 튀어나오지 못한다.

 계모라는 부담감에 눌러 도피하듯 자신의 아들에게만 애정을 품어버린 이. 아화의 새어머니는 압박을 못 이겨 아화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길을 택해 버린다.

 성격은 좋지만 노선을 확실히 잡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가 갈등을 일으키고, 상대방의 도발에 빈번히 넘어가는 욱하는 성격에 사고를 일으키고 마는 이. 데이빗은 아화에게 친밀감과 동질감을 느끼지만, 아화에게 대결을 위해 불법 '폭주'를 부추기는가 하면 아화가 그토록 미워하는 아버지의 레이싱 팀에 얼결에 들어가 버린다.

 친구를 생각하는 방법이 조금은 엇나갔던 이. 지아러는 절친한 아화를 위해 2등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레이싱 대회도 아화와 함께 나가기 위해 출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고 이후에 움츠러든 아화가 내뱉은 말이 지아러의 자존심을 상처 입히고, 무리하게 데이빗과 폭주를 하는 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이렇게 저마다의 상처와 답답한 부분을 안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적절한 밸런스로 다루고 있다. 안타까운 결말을 맞기도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며 저마다 가지고 있던 문제를 해소하는 마무리가 된 점이 참 좋다.

무리하게 데이빗과 폭주를 하는 중에 운명을 달리한 지아러

 

 지아러가 운명을 달리하고 어떻게든 끝을 내기 위해 오토바이를 청하러 아화가 아버지를 찾아간 장면이 이 작품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둔 울분을 이를 악물고 토해내는 아화의 모습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던 아버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오토바이를 아화의 수리점에 보낸다. 수리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오토바이를 탄 채로 아화와 조용히 눈짓으로 대화하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정말 솔직하지 못한 부자지간이구나 싶었다. 서로를 싫어했던 건 어느 정도는 동족 혐오였을까 싶어 속으로 조용히 키득였다.


 끝으로 기억에 아직도 진하게 남은 데이빗의 대사를 적어본다. 글의 첫머리에 있는 대사는 영화 초중반에 바닷가에서  데이빗이 아화에게 건넨 말이다. 아래 대사 또한 데이빗의 말이지만, 영화 말미에 나오는 이 한 마디는 한 단계 높은 성숙함을 보여준다.


늙어서 추억은 없어도 괜찮지만, 후회가 많으면 큰일이지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알라딘)

(이동승 감독 정보 출처: 중국 위키피디아(https://zh.wikipedia.org/wiki/%E7%88%BE%E5%86%AC%E9%99%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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