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은 1986년 개봉한 홍콩 느와르 영화로 원제는 '英雄本色(영웅본색)', 영어 제목은 'A Better Tomorrow'로 뉘앙스가 사뭇 다른데, 영어 제목인 'A Better Tomorrow'가 더 울림이 있게 다가온다. '더 나은 내일'을 바랐을 뿐인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이 작품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형제의 이야기-자호, 자걸
'영웅본색' 1편은 송자호(적룡), 자걸(장국영) 형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없으면 죽고 못살 정도로 우애가 깊었던 자호와 자걸 형제는, 자호가 조직에서 손을 떼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일이 틀어지며 가족에 비극이 찾아오고 이로 인해 둘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져 버린다.
예고 없이 찾아온 형, 자호(적룡)을 반갑게 맞이하던 자걸(장국영). 이런 행복한 시절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홍콩 느와르 영화를 여러 편 보면서 느낀 점은, 새로운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자호는 조직원으로 마지막으로 한 일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다 출소한 뒤 자걸을 찾아가지만, 그를 맞이한 건 동생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지만 자걸은 그의 형에게서 매몰차게 등을 돌린다.
적룡 아저씨는 절절한 형의 마음을 너무 잘 표현해줬고, 장국영은 상처받고 차갑게 식어버린 동생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출소 후 자신을 찾아온 형, 자호와 한바탕한 자걸. 사랑해 마지않았던 형을 미워해야 하는 자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난 경찰이고 형은 깡패야. 우린 가는 길이 달라.
자호가 자걸에게 기회를 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문득 '무간도'가 떠올랐다. '무간도'에서도 조직의 첩자인 유건명(유덕화)과 경찰의 첩자인 진영인(양조위)이 비슷한 대화를 나눈다. 조직원보다 첩자로 잠입한 경찰의 생활에 녹아든 유건명이 그 삶을 놓고 싶지 않아, 그 사실을 폭로하려는 진영인에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진영인은 미안하지만 자신은 경찰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무간도'에서의 이 장면이 '영웅본색'의 장면과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난 경찰이야." -영화 무간도 中.
유건명과 진영인은 첩자의 삶을 살며 정신적으로 고통받았지만, 진영인은 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점점 엇갈리는 형제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마지막에서는 조금이나마 관계가 회복되는 듯한 뉘앙스를 남겨줘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사실은 자호의 잘못만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못했고 인정하기 싫었던 자걸이 결국은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걸의 복잡한 심정을 꾹꾹 눌러 담은 눈빛과 감정 표현으로 보여준 장국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걸이 현실을 점차 마주하며 변모하는 과정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장국영은 영웅본색이 나올 당시 30대로 진입하는 나이었는데, 마치 10대같은 순진무구한 소년의 모습을 위화감 없이 보여주어 출연 당시의 나이를 나중에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장국영의 작품은 공교롭게도 '패왕별희', '야반가성', '아비정전'과 같이 상처를 입고 본디 어두운 내면을 간직한 인물로만 나오는 작품을 먼저 접해서 그런지, '영웅본색' 초반의 명랑한 연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나중에야 '종횡사해', '천녀유혼'을 접하고 이런 밝은 역할도 참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마크, 주윤발 아저씨의 매력
대부분의 홍콩 느와르에서 그렇듯, '영웅본색'에도 비극을 좋아하는 취향을 관통하는 요소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초반에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보여주어, 중후반에 벌어지는 극명히 대비시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닥쳐올 미래를 모른채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자호와 마크.
특히 조직 생활을 하며 자호와 막역한 사이인 마크를 맡은 주윤발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까리함'의 대명사이지만, 유쾌 발랄한 에너지도 넘쳐흐른다.
영화 초반,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에 불을 피우는 이 장면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다들 한 번쯤은 봤을 정도로 유명한 장면이다.
비장한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게 무거워질 수도 있을 부분을, 마크의 유쾌함이 적절하게 중화시켜준다. 성냥을 입에 문 채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가끔은 끼를 부리는 행동이 참 귀엽다. 주윤발 아저씨와 '귀엽다'라는 형용사가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꽃병의 꽃을 들고 능글맞게 여직원을 꼬시려던 마크(주윤발)
표면적으로 주연은 자호, 자걸 형제였지만, 마크도 못지않게 중요한 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호가 함정에 빠져 조직에서의 마지막 일을 그르치고 감옥에 들어가자, 자신의 일처럼 격분해 대신 복수를 감행한다. 이후 엇갈린 자호와 자걸 형제의 사이도 되돌리려 애를 쓴다. 혼란스러워하며 점점 비뚤어지고 막 나가려는 자걸의 고삐를 쥐고, 정신을 차리게 해준 마크가 없었다면 자호와 자걸 형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네 형은 새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는데, 너는 왜 형을 용서할 용기가 없냐며 자걸을 야단치며 깨닫게 해주려던 마크
장국영 추모 기획전으로 '영웅본색'을 영화관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보게 되어 정말 기뻤다. 누가 보면 왜 과거 속에 사느냐고 묻거나 웃을 수도 있겠다.
1980~1990년대 후반을 풍미한 작품들이 담고 있는 감성과 낭만은 건조한 삶에 작은 위로가 되고, 메마른 가슴을 뛰게 만든다.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뜨거운 의리는 시대를 초월해 보는 사람마저 동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그에 대한 향수(鄕愁)를 품게 된 내 자신이 아직도 의아하다. 하지만 그게 나의 취향인 걸 어쩌리.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