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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광모 Nov 14. 2024

추곡수매

추곡수매 – 1982년 즈음


벼베기가 끝나면 벼를 말리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벼를 잘 말려야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고, 등급은 곧 수입을 의미했다. 벼농사외에 돈을 마련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추곡수매는 말 그대로 1년 농사였다. 추곡수매에서 돈을 만들지 못하면 돈이 필요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빚을져야만 했다. 농민의 삶이 그러했던 시절이다. 요즘에는 비닐 하우스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돈벌이가 가능했지만, 그 때에는 벼 농사가 유일한 돈벌이 수단이었다. 


추곡수매를 하는 날이면, 아부지와 엄마는 새벽부터 장사 준비를 하셨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점빵을 했었다. 여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많은 음식들을 준비해야했고, 수매 등급을 매기는 공무원들도 우리집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그분들만을 위한 반찬도 마련해야했다. 어찌되었든 칼자루는 그 분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하는 일 역시 중요한 부분이었다. 


추곡수매를 위해서는 말린 벼를 가마니에 넣어 길가에 나란히 쌓아야 했는데, 쌀을 나를 수 있는 운송수단은 다양했다. 경운기가 가장 좋았지만, 역시나 각 마을에 한 두 대 정도 밖에 없었다. 소가 끄는 달구지도 있었고, 리어커를 이용하는 분들도 계셨다. 물론 동네 가까운 곳에 사는 분들은 지게를 이요하기도 했다. 


수매가 끝나면 마을별로 이장님들이 돈을 받아서, 개인들에게 나눠주는 형식이었다. 추곡수매 당일 바로 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 농민들이 현금을 쥘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을 것이다. 몫돈의 대부분은 그동안 진 빚을 갚는 일이었다. 농사를 지으며 여기저기에서 끌어 쓴 빚도 갚아야 했고, 외상으로 먹은 술값도 일부는 갚아야 했다. 


외상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우리집에도 외상 장부가 있었는데, 수매가 있는 날과 섣달 그믐날에는 외상을 독촉하는 전화를 했던 아부지의 모습도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난다. 외상이 많으면 우리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우리도 외상으로 물건을 받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우리가 판 물건에 대한 외상을 받아야 장사를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상이 늘어나는데 우리 부모님은 왜 계속 장사를 하셨는지 모르겠다. 이제와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아부지의 마지막 승부수였을수도... 


수매가 끝나고 해가 지려고 할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윷판이 벌어졌다. 장소는 우리 집 안집이었는데, 장사를 하는 집과 연결된 바로 안 집은 평소에는 거의 비어있었다. 마당이 넓어서 윷판이 벌어지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안집으로 몰려들었다. 오랜만에 몫돈을 쥔 어르신들은 기분이 좋아 술도 많이 드셨다. 윷놀이는 어느새 놀음으로 변질이되었고, 서로 고성이 오고가기도 했다. 


아부지는 재미로 윷놀이를 하는 것은 참으셨지만, 돈이 오고가는 놀음은 매우 싫어하셨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그만들 해라잉’ 하시다가, 말을 안 들으면 그냥 윷판을 엎어버리셨다. 불같은 분이셨다. 장사를 위해서라면 윷놀이를 계속 하게 놔두고 술과 음식을 팔아야 했을텐데, 아부지는 ‘놀음’같은 것을 봐주지 않는  분이셨다. 


아부지가 윷판을 엎는 순간 ‘잔치’는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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