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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Feb 06. 2023

(6) 삶의 축제를 만드는 기술

캔디, 축제의 마법 주문

"내일 촬영할 거니까 검정 옷 말고 최대한 알록달록하게 입고 와요! 소품 가져와도 좋아요!"


연습 끝날 때마다 촬영 자주 했으면서 왠 옷이랑 소품? 선생님 말씀에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매일 입는 운동복 중 좀 밝은 걸 입고 오면 되겠거니. 핑크색 입을까 코랄색 입을까 고민한 게 전부였다. 아침에 일어나 연회색 조거바지에 진코랄 브라탑 그리고 제일 짧은 핑크색 크롭 커버업을 골랐다. 이 정도면 내 옷 중 가장 알록달록이다.


요즘 배우고 있는 노래는 캔디. 캔디? 그 캔디? 맞다. 중학생 시절 HOT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바로 그 캔디다. 갑자기 왜 이 노래인가 했더니 HOT와 같은 소속사의 NCT Dream이 약 한 달 전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내었단다. 어쩐지 편곡이 약간 다르네. 약간 미스테리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더니, 테이프가 뒤로 감기는 소리가 휘리릭 나다가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캔디!"


자리를 잡고 연습을 시작했다. 대각선 아래로 팔, 앞으로 올려 가슴 땡기고 오른쪽으로 고개 몸통 위로 짝, 다시 대각선 아래로 팔, 앞으로 올려 가슴 땡기고 왼쪽으로 고개 몸통 위로 짝짝....... 거울을 보니 오늘은 확실히 다르다. 보통의 옷의 절반, 아니 2/3이상이 블랙인데 오늘은 노랑, 보라, 진분홍이 가득. 꽃밭이고 캔디네, 하며 웃는데 뒤에서 "우오오~~~!" 환호가 들려왔다. 뭐지?


세상에, 오렌지색 딱 붙는 민소매티에 남색과 흰색, 핑크가 섞인 꽃무늬 레깅스. 거기에 조그만 두마리 병아리 두 마리가 대롱거리는 머리띠까지! "옛날에 에어로빅할 때는 다들 이렇게 입었어!" 하며 언니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이 분이? 목소리도 크지 않고, 머리도 어깨까지 길러 단정하게 묶고 다니는 60대 '언니'다. 평소 입고 다니는 남색과 회색 운동복은 어디로 가고! 손을 흔들며 사진 찍어달라는 너스레에 나도 크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평소 수업 끝날 때마다 그날 배운 안무를 복습용으로 촬영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당부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왔는데. 이번 촬영은 단순한 안무 기록용이 아니라 정말 공연처럼 찍는 모양이다. 처음이라 모르고 그저 운동복을 입고 왔는데, 아이, 분해라. 이럴 줄 알았으면 캡모자라도 쓰고 올걸. 박시한 후드티라도 입고 올걸.


"자, 2번 더 해보고 촬영할 거예요. 의상이나 소품 가져온 분들은 지금 입고 와서 춰봐요! 안 그러면 이따 진짜로 입고 출 때 우왕좌왕하니까."


더 가져오라고? 이미 다들 알록달록한데? 어리둥절해 있는데 절반 이상이 뒤쪽으로 가더니 주섬주섬 뭘 꺼낸다. 도대체 뭔데, 뭔데?


주황색 비니, 주황색 호박 머리띠, 빨간 후드티에 흰색 비니, 흰색 캡모자에 하늘색 손수건...... 세상에 이분들 다 준비해온 거다. 남편도 모르게 자식도 모르게 세상도 모르게 자기 혼자만, 내일 뭐 입을까 준비하면서 얼마나 키득키득 웃음이 났을까!


그 중 압권은 그 옛날 장우혁의 파란 옷과 비슷한, 정말 잉크에 방금 담갔다 뺀 것 같은 새파란색 면바지였다. 이런 옷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지경의 새파랑. 항상 뒤에서 조용히 춤만 추다 가던 그분은 주섬주섬 파란 면바지를 입더니, 흰 티에 하늘색 비니를 쓰고 마지막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커다란 스키 장갑! 그 시절 HOT로 변신하고 있는 그에게 우리는 모두 환호를 보냈다.

 

촬영 전 두번 더 연습하는데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뱃속에서부터 웃음이 끓어 올라왔다. 다들 밖에서는 점잖게 일을 하러 가겠지. 줄을 서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겠지. 부모를 돌보러 종종걸음을 치겠지. 아이를 돌보러 한달음에 달려가겠지. 


하지만 이곳만큼은, 그리고 이날만큼은 달랐다. 해야 할 의무도, 지켜야 할 도덕도, 나이에 대한 위축도 없이 나를 오직 즐거움으로 가득 채운다. 평소에 입지 못할 의상과 소품을 직접 준비하면서, 서로의 모습을 보고 깔깔 웃어대면서. 그건 자기 삶의 축제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오직 즐겁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중년의 사람에게 축제랄게 있나. 명절은 노동하는 날이고 어린이날은 아이들을 위한 날이고 크리스마스는 연인이나 가족을 위한 날이다. 생일 미역국도 어차피 누가 끓여주지 않는걸. (그나마 주변에 반찬가게가 많아 기쁘다. 직접 끓이진 않아도 되어서.) 나를 위한 축제가 없다면 내가 직접 만들지!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들이 이곳에 가득 모여 있었다.   

을 가르쳐 주는 건 선생님이지만, 이곳에서 선생님은 한 명이 아니었다. 나는 언니들에게 삶의 기술을 배우고 있다. 오늘을 축제로 만들겠다고 마음 먹으면, 바로 축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의 기술을. 제자가 되어 새로 마법 주문을 전수받은 기분으로, 더 높이 더 힘차게 뛰었다. 비록 한 동작은 틀렸지만 쉬지 않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다음 촬영일에 두고 봐. 옷장을 뒤져서라도, 옷가게에 다녀와서라도 축제 준비를 해가야지. 남편도 몰래 아이들도 몰래 세상도 몰래, 나만 아는 축제 준비에 밤새 키득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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