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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Jan 20. 2023

(5) 춤추는 할머니로 살 수 있으면

꿈꾸게 해준 언니들

작년 12월 에어로빅 9시 반(1부) 수강생 송년회가 있었다. 5월에 회식이 한번 있었는데 참석하지 못해서, 이런 자리는 에어로빅을 시작한지 아홉달만에 처음이었다. 11시 반 고깃집, 인원은 약 열다섯.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가운데 네 자리만 빼고 꽉 차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얼마만이지 이런 자리. 첫 회식에 따라온 신입사원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오늘 고기 열심히 구워야지.


선생님까지 오시고 고기와 술이 나왔다. 한 잔, 두 잔, 술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 어색해서 고기 굽다 홀짝 한 잔 마시면 앞에 계신 분이 잘 마시네 하며 잔을 채워주셨다. 어우, 이날 따라 술이 하나도 안 쓰고 달았다.


"근데 몇 살이랬지? 애기 있다며?"

"마흔이에요. 애들 4학년 1학년이에요."

"마흔이야? 어머 우리 애하고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네."

".......네?! 자녀분이 서른 아홉이라고요?"


눈동자가 흔들렸다. 체육관에서 운동할 때 보면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분들이었다. 암만 올려도 50대 후반? 사석에서 뵈니 화장도 곱고 옷차림도 멋쟁이다. 근데 자식이 내 나이면, 도대체 몇 살에 낳으셨다는 거지?


"우린 예순 셋이야. 이 집도 애가 서른 여덟이고."


그야말로 동공지진. 예순 셋?! 환갑이 넘으셨다고? 우리 막내 이모보다 연세가 많다고? 암만 봐도 그렇게 보이질 않았다. 주름도 많지 않고 피부도 곱고, 무엇보다도 눈에 웃음이 가득하다. 웃음이 몸속을 팽팽하게 채우고 있는 걸까. 눈동자 반짝반짝하는 게, 도무지 나이를 믿을 수가 없다.


옆에 계신 분은 예순이란다. 세상에, 체육관에서 가장 예쁜 운동복(핑크색 브라탑에 핑크색 레깅스)을 입고 가장 살랑살랑 예쁘게 춤추는 분이 예순? 이제는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다. 총무 언니는 50대, 그 옆에도 50대, 그 옆에는 60대....... 40대는 나 포함 딱 4명 뿐이었다. 마흔을 막 찍은 내가 1부의 막내였다. 나이 마흔에 어디 가서 막내라니. 세상에 소리를 오늘 몇 번 하는 건지.


오래 운동을 함께 해온 이들은 10년 넘는 시간 동안 나이도 함께 먹었다. 운동뿐 아니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40대였던 이들은 50대가 되었고 50대였던 이들은 60대가 되었다. 그러나 함께 있을 때 시간의 흐름은 무색해진다. 그저 함께 춤을 추는 동무일 뿐이다. 처음 춤추러 왔을 때의 말간 얼굴을 여전히 간직한.


"언니라고 하긴 좀 그런 거 아냐? 이모라고 하라고 해야 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여기서 만나면 다 언니지! 안 그러니 유진아?"

"네, 언니! 여기선 무조건 언니죠!"


약간 취기가 오른 채, 나는 큰 소리로 언니를 불렀다. 언니 한 잔 드릴게요. 언니 이거 드세요. 언니 고마워요. 나는 정말로 고마웠다. 나도 저런 얼굴로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좋아하는 걸 해서 눈이 반짝반짝한 사람으로. 매일 아침이면 운동복을 갈아입고 갈 곳이 있어 행복한 사람으로. 언니들은 내게 20년 후를 꿈꾸게 해주었다. 언니라고 못 부를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언니, 무조건 언니.


할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춰야지. 언니들을 보니 아직도 출 수 있는 날이 한참 남았네. 머리도 길러보고 짤라보고 옷도 이것도 입어보고 저것도 입어봐야지. 추다 추다 무릎이나 어깨가 아파서 못 뛰겠으면, 11시에 있는 라인댄스 반에 가야지. 거긴 60대가 제일 젊대. 또 막내가 되어서 열심히 언니 언니 부르면서 오늘처럼 웃어봐야지.


얼마 전 누군가 내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별다른 꿈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냥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날 송년회에서 꿈이 하나 생겨버렸다. 춤 추는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 춤 추는 할머니로 살 수 있으면, 글 쓰는 할머니로도 꿈 꾸는 할머니로도 살 수 있겠다. 그러니 춤추는 아줌마에서 춤추는 할머니가 되어가고 싶다. 언니들과 함께, 그리고 언젠가는 나보다 스무살 어린 동생들과 함께.


참. 그 언니들은 그날 1,2차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커피숍에 갔다가 다시술을 마시고 12시에 들어갔다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9시에 멀쩡한 얼굴로 또 운동을 나왔다지요.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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