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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Sep 15. 2023

[쓰기의 바람 6] 지금이라면 결코 그렇게 쓰지...

글도 진실도 나이를 먹는다

마지막에 인용된 소설은 나의 첫번째 소설집에 실렸다. 서두에 인용된 소설은 그로부터 20년 뒤에 나온 여섯번째 소설집에 실렸고, 두 소설 사이의 시간이 뚜렷이 보인다. "지금이라면 결코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새 소설이 씌어진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중



똑같은 책을 읽어도, 똑같은 영화를 보아도 언제냐에 따라 그 감상은 완전히 다르다. 엄마가 한 말이 기억난다. "학교 다닐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을 때는 너무 순수한 사랑이라 생각되서 마음이 아팠거든? 근데 이 나이 먹고 읽으니까(50대) 불륜 얘기처럼 보이는 거야!"

엄마와 함께 깔깔 웃었다. 순수한 사랑이 한순간 불륜으로 추락하다니. 하지만 40년의 세월이라면 읽는 이의 눈을 다르게 할만도 하지 않겠나. 그때의 엄마와 지금의 엄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테니.


남이 쓴 글만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쓴 글도 나이를 먹는다. 불과 4년 전 쓴 <어른의 그림책>인데도, 어떤 글을 보고 있으면 '왜 이렇게 썼지' 싶다. 지금 쓰라면 다르게 썼을 텐데. 물론 지금 쓰는 글이 더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때 쓴 글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때는 그게 진실이었다. 쓴 내가 달라졌을 뿐, 쓰여진 글은 죄가 없다. 그렇다고 그 글을 지우거나 책을 없앨 수도 없고, 지금은 아니에요 라고 반박글을 쓸 수도 없다. 그저 지금의 글을 쓸 뿐이다. 이 글도 또 나이를 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내게 진실한 걸 쓴다.


독자는 한 시절의 작가를 만나고 사랑한다. 사랑하던 글이 달라지면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독자의 시간이 흘러가듯 작가의 시간은 흘러가고, 그의 글과 책은 변한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나와 비슷한 속도로 나이들어가기를. 또 비슷한 속도로 나이들어가는 독자가 내게도 있기를. 그렇게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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