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인간의 존재 이유
쓸모 [쓸모]
1. 쓸 만한 가치.
2. 쓰이게 될 분야나 부분.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던가, 쓸모없는 건 사지 말라는 이야기는 마치 격언처럼 내려온다. 늘 낭비 없는 선택을 위해 오감을 곤두세워야 하고 쓸모없는 일에는 시간이나 비용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쓸모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되려 쓸모없는 짓 하기나 쓸데없는 물건 선물하기 같은 반발로 나타나기도 한다. 쓸모의 기준은 무엇이며 도대체 그 쓸모는 누가 정한다는 말인가.
주관적 쓸모
쓸모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쓸모를 정하는 것에 있어 객관적인 기준을 가져야 한다 말하고 싶겠지만 모든 쓸모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쓸모를 정해주는 게 기계나 AI가 아닌 이상 말이다. 아니 설령 기계나 AI가 쓸모를 정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프로그래밍하는 인간의 의도와 주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역시 객관적이라 하기 어렵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주관에 의해 얼마나 쓸모 있는가 판단을 당하며 쓸모 있는 인간이 되거나 혹은 쓸모없는 인간이 돼버리고 만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쓸모가 주관적인 만큼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는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는 쓸모 있던 인간도 다른 곳에선 쓸모없는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간혹 선망의 대상이 되는 예외적 인간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과 능력이 쓸모 있다고 판단되는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게 어디인지 또 나를 쓸모 있다고 판단해줄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쓸모의 주체는 누구?
ADHD 장애가 있는 자퇴생에서 하버드 교수가 된 토드 로즈 교수는 쓸모를 정하는 기준 중 하나인 ‘평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평균은 환상일 뿐이고 개개인은 모두 다른 개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 개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가 정하는 쓸모의 기준은 형편없고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그의 저서 <평균의 종말>은 이를 증명하는 예시로 구글과 IGN의 인재채용법을 소개한다. 두 회사 모두 전통적인 채용 기준을 버리고 다차원적 기준으로 개인의 특성을 발견하여 인재를 채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쓸모를 결정하는 외부적 주체가 유연하고 융통성 있다면 자신의 쓸모를 발견할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굳어있는 세상에서 그런 주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또 쓸모를 찾아야 하는가.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는 자신의 쓸모를 냉정하게 마주하는 주인공 계나가 등장한다. 평범한 학벌, 평범한 집안, 평범한 직장을 배경으로 특출난 재능 하나 없는 그녀는 한국에선 본인이 경쟁력, 즉 쓸모가 없다 판단하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선택한 호주에서 그녀는 쓸모가 있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한국을 떠났다고 해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환경적 배경이나 재능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환경만 달라졌을 뿐인데 계나는 그곳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계나 스스로가 자신의 쓸모를 발견했다. 누군가는 그녀의 행보가 쓸모없다 얘기할 수도 있다. 또 언젠가 그 장소 역시 쓸모를 잃는 곳으로 변모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현재 계나가 본인을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쓸모의 주체가 되어 본인의 쓸모를 찾았다.
쓸모없는 인간의 존재 이유
외부적으로 혹은 내부적으로 쓸모의 주체를 적극적으로 바꾼다면 누구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진짜일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근본적 문제에 봉착한다. 왜 쓸모가 있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은 평생 스스로의 쓸모를 입증하는 과정일뿐인가?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 수는 없는 걸까? 쓸모에 대한 생각은 쓸모없는 인간의 존재 이유로부터 출발했다. 쓸모없는 인간. 부정적인 기운과 우울함을 풍기는 이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숨이 턱 막힌다. 가끔씩 아니 사실 자주 스멀스멀 내려가는 자존감이 언제나 나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판단하게 조종했기 때문이다. 끝내 어디서도, 그 누구도 내 쓸모를 찾지 못할 거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렸을 때 뇌리를 스친 건 자기 합리화를 위한 질문이었다. 평생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 수는 없을까? 쓸모없는 인간도 어디에 쓸 데가 있을 거라는 낙관이 아닌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체념적 욕망이 점점 커져 갈 때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내 쓸모를 찾아서, 혹은 쓸모가 없어도 된다는 핑계를 찾아서. (여기선 불가항력적으로 주체적 활동이 어렵게 된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다. 그건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세대가 바뀌어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환자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반드시 해야 한다, 꼭 하자 조금 같은 부담스러운 조언보단 괜찮다는 위로가 각광받는다. 그 안에는 쓸모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소중하고 각자 쓸모가 있다는 따뜻한 말들이다. 대충 살자는 말조차 열심히 하는 시대다. 냉소적 낙관주의가 팽배한 세상은 쓸모없는 인간에게 넌 지금 쓸모없는 게 맞지만 언젠가 너의 쓸모를 찾을 거라는 모호한 용기를 불어넣는다. 평생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아도 된다는 주장은 없다.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은 있지만 쓸모없는 자를 위한 변명은 없었다.
내 쓸모의 입증
슬픈 결론이지만 아직 쓸모없는 자를 위한 대담하고 매력적인 대변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내 쓸모를 찾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렇게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이다. 게다가 쓸모없는 사람의 말로는 그다지 밝지 않다. 쓸모없는 삶이 좋았다면 분명 글이라도 냈을 텐데 그 쓸모없는 글조차 없으니 안 봐도 뻔하다. 딱 하나 위로가 되는 건 쓸모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주식 차트처럼 수시로 변해서 종잡을 수 없다. 절대적이고 거대해 보이는 쓸모가 존재하겠지만 일단 그건 내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아주 작디작은 쓸모가 있다가 없다가 할 뿐. 변명도 없고 도피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하나다. 내 쓸모의 입증. 오늘 나는 얼마나 쓸모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