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정도는 복잡한 경쟁 사회에서 잠시 나를 데리고 나와도 괜찮다
하얀색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내 얼굴을 간지럽게 쓰다듬는다.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다시 잠이 든다. 이불에 얼굴을 더 파묻고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조금 더 자도 괜찮아’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좋은 점은 햇볕이 나를 안아주는 시간에 천천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는 하나 같이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야 인생을 바뀔 수 있다고 하는데. 책장에서 기적의 아침을 노래하는 녀석이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어제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서 늦게 잠들었다. 유독 카페인에 약한 체질이라 카페에 가도 녹차 라테만 마시는데, 웬일인지 전 날 들렸던 카페 두 곳은 모두 커피만 팔았다. 잠을 설쳐서 무거운 몸을 침착하게 침대에서 끌어내린다.
집을 둘러보니 가족들은 모두 일터로 떠나고 나 홀로 거실에 남아 있다. 한 때는 독립을 외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1인 가구 라이프’를 즐기게 되었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대체 언제쯤 철이 들까.
유월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다. 숲 속에 있는 우리 집은 창문만 열어도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산꼭대기에서 선선하게 내려오는 바람, 초록의 기운을 한껏 머금은 녹음, 새 들이 건네는 아침 인사까지 모든 게 완벽한 시간.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공기에 스며든 산 냄새를 만끽한다.
아침을 엄마와 함께 보내지 않으면 억지로 아침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식당에 가면 밥을 먹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들과 씨름을 하는 엄마들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집은 그 구도가 삼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엄마가 없으니 밥 대신 향긋한 티백으로 우려낸 메밀차와 새콤달콤한 방울토마토로 하루를 가볍게 시작한다.
요즘 집에서 즐겨하는 운동은 요가. 잠이 덜 깬 상태로 요가를 하며 몸을 풀고 정신을 맑게 한다. 나의 요가 선생님은 강물처럼 낮은 목소리가 매력적인 유튜버 ‘요가 소년’이다. 홈트레이닝 요가는 유튜브 채널을 켜고 요가 매트를 깔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다. 운동을 하기까지 준비하는 고비만 넘기면 선생님을 따라 요가를 따라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느 정도 집에 혼자 있다 보면 문득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족들은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고객이나 상사에게 시달리고 있을 텐데, 나 혼자만 평온하고 여유로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럴 때마다 재즈를 크게 틀어 놓고 집 청소를 한다.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잡념이 사라져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진다. 어느새 나를 괴롭히는 불안과 걱정도 함께 정리된다.
조용하고 나른한 오후, 책장으로 걸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 감성을 자극하는 에세이와 돈 버는 기술이 담긴 경제서적을 한 권씩 양손에 든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책에만 집중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책을 읽으며 오래 기억하고 싶거나 블로그에 올리고 싶은 부분을 따로 적어둔다. 세월 앞에서 기억은 초라해지지만 기록은 더욱 굳건한 힘을 갖게 된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책 두 권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은 금세 흘러버린다.
하늘의 명도는 점점 낮아지고 가족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온다. 혼자 있다가 가족들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나만의 시간이 끝나서 아쉽기도 하다. 엄마와 함께 따끈한 김치찌개를 끓이고 냉장고에서 밑반찬들을 꺼내 맛있게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거실에 모여 앉아 트로트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며 어떤 가수가 노래를 가장 잘하는지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외출할 일이 없는 날은 혼자 집에서 잔잔한 하루를 보낸다. 하루 정도는 바쁘고 복잡한 경쟁 사회에서 잠시 나를 데리고 나와도 괜찮다. 아늑하고 포근한 내 공간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편안한 옷을 걸치고 그저 잘 쉬는 것이다. 아침에 날 깨우던 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검은색 배경이 짙게 깔린다. 분명 특별할 것 없는 ‘가장 보통의 하루’를 보냈는데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넉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