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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숲 Jul 30. 2020

적당히 견딜만한 가난





우리 집은  내가 견딜 만큼 가난했다. 적당한 가난, 조금의 불편함을 참고 약간의 모욕을 받아들이면  정도 가난은 버틸만했다. 점차 가난을 인지하는 감각은 무뎌졌고 그렇게 괜찮다고 느낄 때쯤 가난은 서서히 스며들어 나를 차지했다.



초등학교  일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바퀴가 달린 간이 떡볶이 집이 있었다. 친한 친구들과 집에 가며 자주  떡볶이 집에 들렀는데, 항상 사주는 쪽은 친구들이었다. “너도  번쯤은 사줘라.”, “에이, 얘는 짠순이잖아.” 매번 사주기만 하던 친구들이  마디씩 했다. 나는  말을 듣고서야 그동안 얻어먹기만 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니야. 내일은 내가 떡볶이 쏠게!” 다음  나는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서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사줬다.



그렇지만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친구들이 떡볶이를 사는 횟수는 여전히 훨씬 많았고, 나는 눈치를 보다가  쓴 말이 다시 나올 때쯤에서야  번씩 샀다. 그런 패턴이 계속 반복되면서 우리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우리 집이 너희 집보다  사니까떡볶이를 사는 빈도는 달라도 된다는, 뭔가  밖으로 꺼내 확실하게 정의 내릴  없는 무언의 이해와 인정.



금방이라도 술잔에서 넘칠 것처럼 보여도 팽창력 때문에 흘러내리지 않는 맥주처럼 견디면 견뎌지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는 가난이었다. 반찬투정은 했어도 밥을 굶은 적은 없었고, 좁은 빌라였지만 작게나마  방이 있었다. 운동화  켤레를  닳을 때까지 신었고, 예쁜 옷이 없어 교복만 입고 다녔어도 그냥 그런대로 살만했다. 가끔씩 친구들을 보며 부러움이 싹틀 때마다 ‘아직 학생이니까, 괜찮아.’라는 말로 자라나는 새싹을 모질게 잘라냈다.



때로는  말에 취해 정말 괜찮은  같기도 했다. 내가 노력하면 충분히 해결하고 벗어날  있는 정도의 가난이었으니까. 괜찮았다. 그런데 적당한 가난은 나를 자극하기보다  환경에 조용히 젖어들게 만들었다. 나는 가난에 적응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자꾸만 현실에 안주 만들었다. 주저 않게 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엄마를 끊임없이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엄마, 나도 파마해보고 싶어”, “엄마, 나도 핸드폰 사주면  ?”, “엄마, 우리도 바다로 여행 가자!” 그러다 가난이 불편하지 않게 되고 나서는 어떤 이유로도  이상 엄마를 보채지 않게 되었다.



가난을 극복하는 것보다 익숙해지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렇게 나는 욕망하고 갈구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놓아버렸다고 해야 할까. 삶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고 선택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오래 꿈꿨던 길을 가보지도 않고 내려놓은 이유는 은은하게 나를 물들여놓은 가난 때문이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라도 떡볶이 정도는 가뿐하게 사줄  있는 어른이 되었다. 나를 무겁게 만들었던 적당했던 가난의 물기를 말끔히 털어냈다. 의외로 그곳에서 헤어 나오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바보같이 너무 오래  안에 잠겨 있었던  같다. 가난에 묶여 아무런 시작도 하지 않았던 시기는 지나갔다. 그리고 세상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글쓰기가  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토록 원했던 길이라면 상관없다. 꿈을 꾸며 글을 쓰는  시간이야말로 값으로 매길  없는 귀한 것이라 믿으니까. 괜찮다. 오늘도 보석보다  빛나고 소중한 꿈을 향해  글자씩 꾹꾹 눌러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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