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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숭 소피 May 01. 2023

번아웃을 항해하는 중입니다

방황하기 좋은 오후예요.

직장인들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찾아온다는 번아웃.

최근 몇 달간 제가 그 번아웃을 겪었던 것 같아요. 오늘은 번아웃 기간을 통과하면서 느꼈던 점이나 생각들을 조금 공유해 볼까 합니다.




제가 번아웃이 왔다고 인정하게 된 건 퇴근 후 누워서 유튜브만 무한 시청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을 때였어요. 그 전까지는 그냥 지쳐있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었어요. 유튜브도 재미있어서 보는 게 아니라 가만히 숨 쉬고 있기 위해 틀어두는 것에 가까웠어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콘텐츠로 제 시간을 채워버린 이유는… 제가 하는 고민에 대한 답이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일까 봐 두려웠던 것 같아요.


처음엔 어째서 일이 재미없어진 건지 고민했었는데, 이때만 해도 어떻게 하면 다시 재밌게 일할 수 있는지 찾는 게 목적이었어요. 어쨌든 일은 계속한다는 전제였죠. 그런데 고민은 점점 덩치가 커졌고 ‘프로덕트 디자이너를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게 과연 맞는 걸까?’ 같이 하루 앓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어갔습니다.


이 생각은 언제나 제 뒤에 바짝 붙어있는 괴물이 되어 버렸어요. 이 고민을 마주하기가 너무 무서워서 계속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면서 즉각적인 재미로 생각을 멈춰버렸습니다.


저는 원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프로덕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매일 자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배운 점과 새롭게 적용할 점을 적으면 정말 뿌듯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회사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을 자기 전까지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해결 방법이 떠올라서 자다가 일어나 피그마를 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늘 인사이트가 넘치는 직업이었고,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행운처럼 느껴졌었어요.


그랬던 제가 요즘 들어 출근 전 마음을 다잡는 데만 1시간을 쓰고 있더라구요.

저희 회사는 자율출퇴근제라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다 보니 제 출근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요, 결국 대다수의 동료들이 출근하는 시간보다 더 늦게 출근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어요.


출근해서도 전체 업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때그때 들어오는 업무만을 쫓아가다 보니, 하나의 업무에 2~3시간 집중하는 덩어리시간을 만드는 게 점점 힘들어졌구요. 업무 생산성이 많이 낮아진 거죠.


이런 시간이 이어지자 제 안에서는 또 불안함이 피어올랐어요. 연차가 쌓여가는데 퍼포먼스는 오히려 열정 넘쳤던 주니어 시절만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이 시기의 저는 번아웃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쩌면 정말 잘 고민해서, 이 일을 그만두는 게 저 자신을 사랑하는 길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일을 그만 둘 이유를 구체적으로 적으려 했습니다.


그만 둘 이유를 적으려고 했는데 자꾸 계속해야 할 이유만 적혔어요. 계속해야 할 이유를 적으면서 아직은 프로덕트 디자이너를 그만둘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제가 발견했던 가치와 이 일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깨닫게 되니, 벌써 그만두기엔 너무 아쉽더라구요 :)


이 글을 읽고 계신 프로덕트 디자이너 중에 ‘이 일을 그만두기 전 한 번이라도 누군가 말려주면 좋겠어’라는 심정이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 저는 이 직업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었어요.


저는 원래 시야가 좁고 고집스러운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프로덕트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Design Thinking이라는 방법론을 배우게 됐지요.

Design Thinking을 훈련하면서 타인을 관찰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많이 커졌어요. ‘저 사람 왜 저래’로 끝났던 제 생각이 정말 진지하게 ’왜 그랬을까 ‘를 고민하게 되었고,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신발에 내 발을 넣고 걸어보면서 문제의 원인을 사람에게서만 찾지 않고 좀 더 복합적인 여러 상황을 고려할 수 있었어요.

Design Thinking은 단순히 프로덕트 디자인을 위해서만 발휘되는 게 아니라 제 모든 인간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어요.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니까 자연스럽게 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게 되었고요. 이전보다 좀 더 포용력 있고, 이해가 넓어진 제 스스로가 더 좋았습니다.



2. 이 직업을 통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이전보다 더 깊은 몰입과 성숙을 이룰 수 있었어요.


프로덕트는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디자이너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내부적으로는 함께 프로덕트를 만드는 PM과 개발자들을 이해하며 동료로서 일하는 호흡을 맞춰가야 하고요, 초점을 더 넓히면 프로덕트를 운영하는 운영팀부터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저들까지,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수많은 목소리들 속에서 의미를 찾고 인사이트를 얻는 여정을 계속해서 걷게 돼요.


이 여정 속에서 직장 동료는 저와 함께 걷는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이 길을 걷는 이유와 길을 걸으며 얻은 멋진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이런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지금의 회사를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고 프로덕트 디자이너였기에 이 회사에 채용된 것이므로, 제 직업에 감사하게 되었어요.



3.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었어요.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IT 산업에 필요한 핵심 인력 중 하나이고 다른 디자인 직군에 비해 찾는 회사가 많아요. 그리고 평균 연봉도 높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 이러한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직업은 제게 단순히 돈과 일자리만 선물했다고 보기엔 너무 큰 가치를 제게 알려줬습니다.

저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를 하면서 제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고, 나아가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종종 느꼈어요. 제가 만든 서비스를 통해 누군가가 꿈을 이루고 행복해졌다고 생각하면 지금 좀 힘들더라도 더 잘해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힘이 생겼었던 것 같아요. 이런 기분을 번아웃 동안에는 잊고 있었습니다.


더 생각해 보면, 하나의 프로덕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려있더라고요. 저도 이 프로덕트를 위해 회사에 출근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고, 저뿐만 아니라 다른 디자이너들이나 PM, 개발자, 운영자도 하나의 프로덕트를 돌리기 위해 회사에 모였습니다. 프로덕트 하나가 많은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에 단순히 이걸 재미없다고 내려놓는 건 프로덕트의 무게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저는 일에서 재미보다 좀 더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걸 고민의 시간 동안 알게 되었습니다.



4. 목적지향적으로 살게 되었어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한 모든 시간은 결국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간이었어요. 회사의 비즈니스 목표를 위해서, 그리고 저 개인의 목표를 위해서 달리는 시간이었죠. 주니어 때는 단순히 한 사람 몫을 해내자는 목표를 두고 달렸어요. 하지만 연차가 쌓이자 한 사람 몫은 해내게 되었고, 이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어떤 목표를 갖고 달려야 하는지 불투명해져서 그동안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계속 일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직업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일에 몰입했을 때 문제 해결에 필요한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쌓을 수 있겠더라고요. 이 힘은 언젠가 제 삶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는 날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5. 저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일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로 몇 개월간 출근을 하고 업무를 했지만, 그러한 상태에도 여전히 저는 최선을 다해 제가 맡은 일을 완수하고 번아웃 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방황의 시간은 괴롭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렇게 자신에게 집중했던 시간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프로덕트 디자이너란 직업에 확신이 떨어지고 방황 중인 분들께 값어치 있는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민이 드는 지금이 방황하기 딱 좋은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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