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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23. 2022

음악, 전공해야겠다 결심한 날

나는 언니랑 단 둘, 오빠도 없고 동생도 없다.

어렸을 때 언니는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그때는 뭐 학원을 이것저것 다니던 시절이 아니라 기껏해야 속셈학원, 피아노 학원, 주산학원, 서예 정도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다니던 학원이었다. 네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난 언니가 하는 게 다 하고 싶었다. 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가면 나도 따라갔고, 피아노 선생님이 오셨을 때엔 놀러 뛰어나간 언니 대신에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나도 피아노 레슨을 십 년 넘게 했지만, 사실 그런 황당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꽤 자주 우리 언니는 놀러 밖으로 나갔고, 어릴 때부터 집순이였던 나는 꽤 자주 대타 레슨을 받곤 했다고 한다.

(c)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피아노를 계속 치던 언니 따라, 나도 피아노를 계속 쳤다. 뭐 그리 열심히도 대단하게 잘한 건 아니었지만, 중학교를 갈 때쯤 되니 나도 언니처럼 예술중학교에 시험을 보고 싶었다. 예술중학교 입시는 거의 대학입시를 방불케 한다. 엄청난 공부 학습은 과외선생님을 붙여 해내야 했고, 학교 수업은 절반은 빼먹은 채 집에서 8시간이고 10시간이고 피아노만 쳤다. 그렇게 국민학교 6학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난 언니처럼 예술중학교는 낙방하고 일반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어린 나이에 파란만장 입시를 겪고 나니, 정말 피아노가 꼴도 보기 싫었다. 중학교를 들어가자마자 피아노는 거들떠도 안 보고, 중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개설된 첼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십오만 원짜리 첼로를 사들고는 처음 수업에 들어간 날, 첼로는 줄을 하나하나 음정에 맞춰야만 연주를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함께 수업 듣는 스물 남짓의 친구들 첼로 줄을 선생님과 나와 나눠서 맞춰주다 보면, 한 시간 수업 중 사십 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뭘 배우는지도 모르고 그저 혼자 끄적거리다 보니 남들보다는 조금 빨리 늘고 어느새 아주 쉬운 협주곡 정도 연주할 수 있게 되더라. 그러니 선생님이 얘기하셨다. 너 첼로 전공해야겠다. 내 첼로 중 괜찮은 거 하나 사서 열심히 연습하면 예고는 갈 수 있겠는데? 지금부터 열심히 해보렴.

선생님이 추천해준 첼로는 억대의 억 소리 나는 가격의 악기였고, 나는 중2가 끝날 무렵 첼로를 때려치웠다. 이왕 피아노는 집에 있는 거니깐.. 뭘 말도 안 되는 큰돈을 들여서 음악을 한담?! 하려면 피아노를 하지.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싫어서 도망 다녔던 언니는 고3이 되자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언니의 입시를 위해 엄청난 그랜드 피아노가 생겨났고, 언니는 큰 선생님, 작은 선생님을 번갈아가며 레슨을 받았다. 언니는 결국 피아노 전공으로 대학을 들어갔고, 그해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중3 때부터 그냥저냥 별생각 없이 언니의 작은 선생님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 선생님은 이쁘장하고 키 작고 통통 튀는 분이었는데, 어찌나 똘똘하게 피아노를 가르치는지 정말 재밌었다.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마다 레슨을 위해 집에 오셨는데, 정말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지각을 하셔서, 나 역시 매번 레슨 전에 벼락 연습을 했다. 선생님은 중3이나 된 나에게 단지 피아노 기술뿐만 아닌, 시창, 청음, 음악분석 등등 음악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막상 음악대학에 들어갔을 때 인문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악 수업들이 낯설지 않았음은 분명 선생님 덕분이다.


특별히 전공을 할 생각은 없었다. 뭐 공부도 딱히 못한 편은 아니었고, 영어를 좋아하니 영문과를 갈까, 수학을 잘하니 수학과를 갈까, 뭐 별생각 없이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들어가고도 피아노 레슨을 계속 받으니 제법 칠 수 있는 곡들도 어렵고 기교적인 많은 레퍼토리들이 생겨났다. 딱히 잘하지도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고, 별생각 없이 하다 보니 음악이 참 좋았다. 작곡이라고 끄적거리기를 한나절, 노래를 부르면서 한나절 시간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우리 고등학교에 음악콩쿠르란 게 생겼다. 음악 선생님이 나를 추천하셨고, 난 당시 경험 삼아 준비하던 콩쿠르 준비곡을 연습했다. 쇼팽의 피아노 발라드 1번이었다. 뭐 대단하게 어려운 곡이라고 할 순 없지만, 에튀드 몇 개랑 녹턴 몇 개 섞어 놓은 듯한 기교에 10분이 넘은 긴 길이의 작품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은 잘 치지 않는, 입시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어려운 작품이었다. 전교생이 모여있는 강당에서 나는 10분짜리 곡을 별 실수 없이 무사히 쳐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3-5분 내외의 소나타 한 악장이나 쇼팽 에튀드 한 개 등을 친 거에 비하면 사실 놀라운 거였다. 10명의 학생 중 마지막 순서로 나를 배치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학교 콩쿠르 당일, 나를 제외한 학생들이 40분 정도를 채우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천 명 가까운 학생들이 클래식 음악만 주야장천, 얼마나 지겨웠을까? 거기다가 나 혼자만 십 분이 넘는 곡을 쳐야 했으니. 최대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최대한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무대로 올라갔다. 아이들의 졸리고 지겨워 죽겠는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더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연주를 망쳐도 얘넨 아무 상관없을 거야. 얘넨 그저 졸리고 지겨울 뿐이라고.

(c) 쇼팽 콩쿠르 2015


느릿한 인트로 연주를 시작했다. 쇼팽 발라드 1번은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는 부분도, 웅장하고 엄숙한 부분도, 미친 듯이 질러대는 기교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 구역 한 구역, 방탈출하듯이 하나씩 넘어가다 보면 어느새 종착역. 빠른 스케일로 쾅쾅! 하고 곡을 끝마치니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들렸다. 분명! 우레와 같았다.

사실 연주하는 내 내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기억이 없다. 그 콩쿠르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건 딱 하나, 우레와 같은 환호다. 그때 결심했다. 그래, 피아노를 전공하자!


사실 청중들에게 내 연주는 놀라움이었다기보다는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이지 않았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환호성에 나는 마음이 홀딱 빠졌다. 내가 정말 잘했구나.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무대를 내려오자 내 앞 차례에서 연주한 친구가 물었다. 이게 무슨 곡이야? 어. 이거 쇼팽 발라드야. 그렇구나, 참 좋다. 인문계에서 음악 하는 애들, 다 고만고만한데, 그중에 왠지 내가 특별난 것 같았고, 쫌 잘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편하게 레슨 받았더니 이런 남들이 잘 모르는 곡도 다 연주해보고... 조금 늦었을지 모르지만 나도 피아노를 전공해야겠어! 고2 말에 갑자기 음대를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진짜 하고 싶은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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